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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공포 22 <소설6월10일>
게시물ID : panic_986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빛나는길
추천 : 3
조회수 : 45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6/10 19: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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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향을 찾아간 학생운동 리더
 
 

몇몇의 대학생들이 치안본부 정문을 화염병으로 타격한 그 시간, 신설동 로터리에는 3시가 넘었는데도 유인물 한 장 뿌려지지 않았다. 그러자 전투경찰 버스들이 빠지기 시작한다. 치안본부 정문이 시위대에 급습을 당했다는 무전을 받은 최성식이 이를 악문다.
어떤 새끼가 시위 전술을 짜는지, 우리를 능가하는구먼……
신설동 로터리에서 철수한 최성식 소대원들은 경찰서 내무반에서 대가리 박기, 일명 원산폭격을 하고 있다. 오늘 치안본부 정문이 불에 타버린 것에 대한 기합이다. 최성식이 기합에 힘 들어 비틀거리는 전투경찰의 허벅지를 워커 발로 걷어찬다. 그리고 사이코패스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적들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치본 타격으로 에너미들도 깜짝 놀랐을 거야……. 라고 운동권 새끼들이 지금쯤 낄낄대고 있을 거야. 치본은 치안본부의 약자, 에너미는 영어로 E, N, E, M, Y ‘이라는 뜻이지. ‘은 바로 우리 짭새, 경찰을 말하는 거야.”
그러다가 최성식이 전경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모두 기상!”
전경들이 동시에 일어선다. 다시 최성식이 기합을 즐기듯 내뱉는다.
다시 원위치!”
전경들이 후다닥 머리를 박는다. 최성식은 초점 없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기상! 원위치!’를 수십 번 반복한다.
이정훈이 김영철과 잠실 연립주택을 나와서 걸어가다가 어느 사진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거기에는 아기의 돌 사진 큰 게 걸려있다. 그걸 보고 이정훈이 고향에 있는 누나의 딸을 생각한다.
수연이가 다음 달에 한 살이 되는데……. 수배 떨어지기 전에 한번 가야겠다.’
이정훈이 김영철에게 말한다.
영철아, 오늘 고향에 좀 갔다가 내일 올라올게.”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 아니고 누나 딸이 돌이 됐는데 내가 돌 반지라도 하나 사주고 싶어서.”
간 김에 며칠 쉬다 오세요!”
아니야, 빨리 올라올게.”
이정훈이 여수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고향 여수는 변함이 없다. 그만큼 발전이 없다는 얘기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의해 우리나라는 지역감정이 생겨나고 경상도의 경제 발전과 비교하면 전라도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여수 시내에서 벗어난 변두리 농촌 지역에 이정훈의 집이 있다. 아직도 농사를 짓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전화도 없이 나타난 이정훈을 가족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이정훈이 누나의 딸, 수연이를 꼭 안아준다. 외삼촌인 이정훈이 낯설지만, 조카도 이정훈의 따듯한 마음을 느끼고 얌전히 안겨있다.
누나,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이정훈을 포근하게 맞아주는 가족들의 눈빛에 이정훈의 가슴이 아려온다. 집안의 희망인 이정훈을 쳐다보는 가족들의 눈망울을 보고 있으니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특히 올망졸망 순진한 조카의 눈빛에 이정훈은 목이 메어온다. 이정훈이 돌 반지를 꺼내 누나에게 전해준다.
수연이 돌 반지.”
돈도 없을 텐데, 반지는…….”
누나가 반지를 받아 자기 딸 손가락에 끼워준다.
우와 예쁘다. 우리 수연이는 외삼촌 닮아서 공부 잘할 거야.”
공부를 했으면 누나가 더 잘했지. 미안해, 나 때문에 대학도 못 가고.”
그런 말 하지 마.”
똑똑했던 누나는 어려운 집안 형편을 잘 알기에 남동생 이정훈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장학생으로 여상에 진학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여수 시내 은행에서 근무했는데 이정훈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은 누나가 보내준 것이다. 이정훈이 조금이라도 더 조카와 놀고 싶어 조카를 부른다.
수연아, 외삼촌한테 와봐
이제 갓 돌이 지난 조카가 뒤뚱뒤뚱 걸어와 이정훈의 품에 깡총 뛰듯 안긴다. 강아지 한 마리를 안는 기분이다. 이정훈이 조카를 안고 속으로 되묻는다.
소중한 생명이다. 이 소중한 생명들이 잘 자라나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마당에서는 아버지가 낫을 열심히 숫돌에 갈고 있다. 아버지의 뭉툭한 손이 오늘따라 거칠게 보인다.
죽어야만 끝날 수 있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이다. 내가 해결한다. 아니 내가 못하더라도 해야만 한다.’
아버지가 이정훈에게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참으며 숫돌에 낫을 갈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정훈아, 올해 졸업인데, 군대는?”
아버지의 물음에 이정훈이 아무 말 안 한다. 자기 아들이, 자기 동생이, 자기 오빠가 서울대학에 입학한 후로 학생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가족들은 숨이 막히는 순간이다. 모두가 이정훈의 입만 쳐다본다. ‘졸업하고 군대 가고 취직할 거예요.라는 말이 이정훈의 입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수연이를 안은 채 계속 아무 말 하지 않는 이정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고 있다. 어머니의 눈빛이 불안감에 흔들린다. 누나와 여동생의 눈빛도 흔들린다. 아버지는 다시 낫을 숫돌에 갈고 있다. 서걱서걱 숫돌에 낫 갈리는 소리를 듣던 이정훈이 자기 결심을 말한다.
아버지, 졸업하지 않겠습니다.”
졸업하지 않겠다는 이정훈의 선언에 아버지의 손이 멈춘다. 숫돌 위에 올려져 있는 낫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정훈이 졸업하지 않겠다는 말에 어머니가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누나와 여동생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외할머니가 훌쩍이니깐 이정훈 품에 안겨있던 수연이가 외할머니에게 다가간다.
할머니, 울지 마.”
수연이가 외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눈을 호호 불어주고 있다. 이정훈은 가족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눈에 힘을 꽈악 준다. 아버지가 다시 숫돌에 낫을 간다. 그러면서 침울하게 말을 꺼낸다.
정훈아! 농군은 벼만 잘 베면 되는 거야
숫돌에 갈리는 낫을 이정훈이 쳐다보고만 있다.
다음 날 아침, 여수 고속버스 터미널, 서울로 올라가는 이정훈을 가족들이 배웅 나왔다. 아버지만 보이지 않고 조카는 누나 등에 업혀 자고 있다.
이만 갈게요.”
어머니가 정성껏 싸준 밑반찬 보자기를 들고 버스에 오른 이정훈이 창밖으로 보이는 가족들에게 손짓을 한다. ‘이제 그만 집으로 가시라고....’ 그렇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버스가 움직이는데도 가족들은 이정훈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이정훈이 입술을 깨문다.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진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린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고속버스 안에 설치되어있는 TV에서 올해 9월에 열리는 서울 아시안게임 특집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고속버스가 서울 요금소에 다다를 즈음 어둠이 밖을 장악하고 있다. 버스 차창 유리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정훈이 속으로 맹세를 한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아버지는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다. 평생을 소처럼 묵묵히 농사만 뼈 빠지게 지으셨다. 가난한 우리 집안에 나는 희망이다. 소위 말하는 출세를 해야 하지만 이 땅 민중들의 가난함이 개인의 게으름 탓이 아니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으려 한다. 바로 잡아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 ‘대머리단어는 1980년대 파쇼정권의 전두환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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