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선엽회고록인데....
이사람은 이렇게 데놓고 그렇다해도 어쩔수없다는 표현을 쓰면서 후안무치한 말을 사용했는데
....이런사람이 대한민국 국군 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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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패망은 그 밑에서 부일(附日)했던 친일파 조선인들, 특히 직접적으로 항일 운동의 진압에 종사했던 조선인들에게는 파멸의 의미했을 것이다. 백선엽은 이러한 파멸을 앞에 두고 신속하게 대처한다.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을 때 그는 소련군을 따라온 한인 통역에게 조선 사람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조선은 곧 독립된다. 국호는 동진(東震)공화국이 될 것이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붙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하순, 그는 부인과 함께 그곳을 떠나 도보로 고향을 향했다. 그는 연길과 용정(龍井)을 거쳐 무산(茂山)에서 두만강을 건너 동해안 성진(城津)으로 향했다. 성진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교통수단을 찾았으나 해방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교통은 마비된 상태였다. 그는 계속 동해안을 따라 함흥(咸興), 고원(高原)까지 내려온 다음, 태백산맥으로 들어가 양덕(陽德)을 거쳐 9월 말 평양에 도착했다. 소련군을 피하기 위해 그는 1개월에 걸쳐 장장 800km를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단 평양으로 피신해 온 백선엽은 마침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의 비서실장으로 있던 친척뻘인 송호경(宋昊經)의 소개로 고당의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金日成)이 급격히 부상되자, 백선엽은 만주국의 군관으로 만주에서 공산계 게릴라들을 추격해 다닌 사실이나 열하성에서 팔로군 토벌에 공을 세운 전력이 폭로될까봐 무척 우려했던 것 같다. 10월 하순에는 소련군의 지도로 창설된 적위대(赤緯隊)에 의해 그의 동생 백인엽이 맡고 있던 고당의 경호대도 해산되었다. 메이지 대학을 다니던 중 학도병으로 나가 일본 항공병 소위로 해방을 맞았던 백인엽은 해방 직후 고당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이때쯤 원용덕(元容德)이 백선엽을 찾아왔다. 일제가 패망했을 때 원용덕, 정일권 등의 만군 장교들은 신경에 모였다. 이들은 치안 조직을 만들어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라는 이름을 내걸고 소련군의 눈을 피해 국내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용덕은 그 마지막 대열을 이끌고 국내로 돌아오다가 평양에 들린 것이다. 원용덕의 방문을 받은 백선엽은 불안하고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다며 지체없이 남하할 것을 권했다. 원용덕과 그 일행은 곧장 평양을 떠났다. 얼마 후 정일권도 백선엽을 찾았다. 정일권 역시 원용덕 등과 같이 국내 귀환을 준비하다가, 소련군에게 억류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가던 중 수송열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쳐 오던 길이었다. 정일권도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과 함께 그해 12월 초 남행길에 올랐다.
12월말에는 김찬규와 최남근이 백선엽을 찾았다. 백선엽은 이들과 함께 남행을 결심했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이들은 한 작은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해주에서 내렸다. 밀항선을 마련하지 못한 그들은 12월 27일 밤 청단(靑丹) 부근에서 38선을 넘을 수 있었다. 38선을 넘은 직후 논두렁에서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김찬규가 "서울에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겠다"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을 '백일(白一)'로 고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후 김찬규는 김백일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들은 다음해인 1946년 1월 초순 서울에 도착했다.
참고.
백선엽,《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백선엽,《군과 나》, 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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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쓴 책에 그렇게 나와있으니 출처를 의심할필요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