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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엠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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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4 2017-08-02 19:43:08 3
[형수의 씀씀이가 멘붕입니다] 글쓴이입니다. [새창]
2017/08/02 00:46:33
라면안에민트 이분 좀 많이 이상함..
2433 2017-08-02 19:42:12 0/5
[형수의 씀씀이가 멘붕입니다] 글쓴이입니다. [새창]
2017/08/02 00:46:33
1 참 생각하는 것도 에휴
2432 2017-08-02 19:41:01 3
[형수의 씀씀이가 멘붕입니다] 글쓴이입니다. [새창]
2017/08/02 00:46:33
라면안에민트 먼 개소리람 분란 조장으로 신고
2430 2017-08-02 17:34:40 0
카톡 선물하기 특가떴어요ㅠㅠㅠㅠㅠ [새창]
2017/08/02 13:10:13
저걸 사서 누굴주나.. 그게 더 고민.
2429 2017-08-02 17:29:48 14
제 아들이.. 동성애자였네요... [새창]
2017/07/24 09:35:11
동성애를 하라고 우겨도 못하는 건 맞고, 또 동성애 하지 말라고 해도 할사람은 하는건 맞지만
양성애자 분들도 있고, 또 경계에 있다가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봐요.
2428 2017-08-02 11:53:22 1
미쿡 소주 [새창]
2017/08/01 15:00:09
단 그믐달 밤에는 혼술이다.
2427 2017-08-02 11:08:15 183
자취하는 남자가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우는 이유 [새창]
2017/08/01 10:20:43
거기다가 집밥이 사먹는거보다 싸다구?
된장찌게 하나만 끓여도 집에서 하면 원가가 안 나옴..
식당밥이 훨더 쌈.. (물론 2인 기준)
2426 2017-08-02 08:35:04 0
기가인터넷 속도 저하 될 때 tip (기가 콤팩트 포함) [새창]
2017/08/01 05:17:45
공유기 꿀팁
2425 2017-08-02 00:33:14 0
최고의 신병 [새창]
2017/08/01 16:20:00
군챠트병으로 말년 1개월전까지 예하부대 파견나갔던... 울컥
2424 2017-08-01 23:49:12 12
아재가 알려주는 회사생활 자신만의 꿀팁.txt [새창]
2017/08/01 21:36:36
필요이상의 능력을 나타내지 마라 견제의 대상이다 맹수는 발톱을 숨기는 법이다
2423 2017-08-01 17:23:37 0
박정희 “본래 공산주의 정권 설립하려 했다” [새창]
2017/08/01 07:01:55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자료실장이 황태성에 대한 재판 기록과 언론 기사 등의 자료 및 황태성 생질녀와 그 남편 그리고 손녀 황유경씨 등의 증언을 토대로 황태성이 간첩이 아니라 북한의 밀사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를 최근 출간했다.

황태성((黃泰成·1906~63)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서 1946년 10월 대구 인민항쟁 직후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피해 월북했다.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차관급)에 올랐던 그는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북한의 통일방안을 남한의 주요 인물에게 알릴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가 10월에 체포, 1963년 12월 14일 사형에 처해졌다. ​

왼쪽은 조선공산당 활동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일제 경찰이 촬영한 황태성의 모습(1930)이고 오른쪽은 193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을 당시 황태성의 모습이다. <사진출처=국사편찬위원회>​

그럼 지금부터 황태성의 출생과 젊은 시절 행적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황태성은 1906년 4월 27일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에서 비교적 부유한 중농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4년 동맹휴학 사건(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에 연루되어 퇴학 당한다. 이때부터 그는 일제 강점이라는 외부 모순과 계급 문제 등 민족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서울청년회 활동과 '조선청년총동맹' 결성(1924)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1925년 4월 연희전문학교 상과(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10월에 또 다시 퇴학처분을 받는다. 이후 김천으로 내려와 홍보용(洪甫容)과 함께 김천의 금릉청년회 창립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에 선임, 1927년에는 김천청년동맹 집행위원이 된다. 1927년 6월 신간회(新幹會) 김천지회 결성에 홍보용과 함께 동참, 홍보용이 위원장으로 있던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경상북도위원회에 가입, <조선일보>와 <중외일보> 김천지국 기자가 된다.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경상도 책임자에 선임되지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출옥 후 박상희(박정희 형), 임종업과 함께 경북 지역의 '사회주의자 3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임종업과 함께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창건과 당 재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이 공산주의 관련 조직의 확대를 막기 위해 주요 인사 300여 명을 구속한 '김천그룹재건협의회사건'에 연루되어 1935년 다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는다. 1940년 출옥 후 1944년 8월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에 전라도 책임자로 활동하게 된다. 1945년 10월에는 경상북도인민위원회 선전부장에 선임된다. 그러나 1946년 10월 1일 식량난으로 대구 인민항쟁이 벌어지고 미군정이 '폭동의 배후'로 대구·경북 지역의 남로당을 지목하면서 수배령이 내려지자 1946년 11월 월북한다. 1948년 8월에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다. 1954년 북한의 무역상 부상(副相)을 엮임,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북한의 통일방안을 남한의 주요 인물에게 알릴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가 10월 20일에 체포, 1963년 12월 14일에 처형된다.

박정희는 친형 박상희와 친구였던 황태성을 젊은 시절 한때 멘토로 삼았다고 한다. 해방 후 초급 장교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할 때 신분 보증을 선 것도 바로 황태성이었다고 한다. 황태성은 일제강점기 경북 김천에서 독립운동 활동 중 알게 된 조귀분을 박상희에게 소개했고, 둘은 혼인하게 된다. 후일 이 부부의 딸 박영옥이 김종필과 결혼하여, 김종필은 박상희의 사위이자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이렇게 박정희가(家)와 안팎으로 친분이 두터운 황태성에게 기대를 걸고 쿠데타 세력의 핵심인 박정희 소장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북한은 이미 박정희 소장이 ‘남로당 출신’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에 따르면, 북한은 쿠데타 세력이 장악한 남한 정부에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타진하려 했다. 직전에 남한이 ‘이정현’이라는 밀사를 북으로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답방 성격도 있었다고 책은 전한다.

1961년 8월 31일 황태성(55세)은 임진강을 건너 서울 우이동으로 들어온다. 남쪽에 유일하게 연이 닿는 사람은 당시 중앙대 강사였던 김민하(중앙대학교 총장,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 역임)였다. 그의 집을 찾아가 여동생 황경임의 외동딸(조카딸) 임미정과 그녀의 남편 권상릉을 찾는다. 권상릉은 김민하와 막역한 친구였다. 황태성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박정희와의 만남은 그리 쉽지 않았다. 황태성은 고심 끝에 임미정·권상릉 부부를 박상희의 미망인 조귀분에게 보내 박정희나 김종필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한다. 조귀분 입장에서 황태성은 존경하던 동네 오빠였고 자신의 중매를 선 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여동생 황경임은 자신의 친구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황태성의 등장에 조귀분은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임미정·권상릉 부부의 표현대로 하면, 조기분은 달달달 떨면서 담배 한 갑을 앉은 자리에서 폈다고 한다. 조귀분은 "내게 생각할 시간을 다오"라고 말하고서 임미정·권상릉 부부를 돌려보낸 후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가 결국 김종필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된다. 며칠 후 갓 창설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황태성은 중앙정보부로 연행된다. 황태성의 연행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5․16 쿠데타 세력도 처음에는 황태성을 간첩이 아닌 북한의 밀사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중앙정보부가 임시 본부사무실로 쓰고 있던 반도호텔로 황태성을 여러 번 불러 남으로 내려온 이유와 요구사항을 파악하려 했던 것은 이 같은 추측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황태성의 존재가 언제까지나 비밀로 유지될 수는 없었다. 우선 미국의 정보기관이 황태성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미국은 박정희와 그 일파의 남로당 전력을 의심하고 있던 차에, 북한에서 밀사가 내려오고, 또 그 밀사가 쿠데타 핵심세력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는 정황에 큰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나중에 미국 정보기관은 한국 정부를 압박해 황태성을 직접 심문하기도 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무기로 일대 사상공세를 펼치는 한편, 황태성 문제를 중요 선거 쟁점으로 삼아 박정희를 거세게 몰아쳤다. 미국으로부터 사상을 의심받고 있는 차에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자, 다급해진 박정희는 황태성을 남파 간첩으로 몰아버린다. 그러고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사형을 언도, 미국과 국내 보수 세력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형의 친구이자 북한의 밀사인 황태성을 처형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에 16만 표 차로 가까스로 이길 수 있었다. 그에 관한 정보는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이 ‘황태성 사건’을 폭로하기 전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선거에서 간신히 이긴 박정희에게 황태성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1963년 12월14일 오전 황태성은 총살되었다.

황태성 사건은 1961년 6월 중앙정보부가 창설되고 나서 만든 첫 작품으로 정보기관에 의한 공안 조작 사건의 '원조'다. 그리고 이 사건은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 1967년의 동백림 간첩단 사건, 1973년의 김대중 납치 사건과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 1974년의 문인간첩단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최근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등 크고 작은 숱한 공안 조작사건으로 이어지고 있다.

▶황태성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43년 전의 바로 그날 인 2006년 12월 14일. 경북 상주 소재 황태성 묘에서 조촐한 추모행사가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황태성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처형당한 지도 이제 50년이 넘었다. 황태성은 지금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청상리의 어느 야산 중턱에, 북으로 올라가기 전 한때 함께했던 아내와 같이 묻혀 있다. 황태성은 총살형을 당했기 때문에 화장해서 유골을 교문동에 있는 절에 안치했는데 경찰이 주지 스님한테 왜 이런 걸 맡느냐고 해서 주지 스님이 사정해서 안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미정 씨는 불안해서 다음날 자신의 집에 외삼촌의 유골을 보관해 뒀다가가 다음해인 1964년 한식날 임미정·권상릉 부부가 이곳 선산에다 안치했다.

[출처] 황태성 간첩사건/황태성의 묘지/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작성자 김영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oldenboy196&logNo=220549009332
2421 2017-08-01 09:09:44 2
이 시간 GS25에 계시는 분!!! [새창]
2017/07/27 02:33:42
너무하네
좀있다 잘먹었다 글 올라오겠지
2420 2017-08-01 08:43:4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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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1 22:10:47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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