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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6 14: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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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대를
불과 몇달 앞두었을 때였다.
어느날 면회를 온 그녀는
한참동안 망설이더니,
갑자기 해외로 떠난다고 했다.
그것도 일주일 후에..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대체?
가족이 모두 이민가.
나도 따라 갈거야.
가지마, 나를 두고 어떻게.
가야 해 안돼! 부탁이야 !
여기 있으면 뭐할건데.
전부 이민가는데
나혼자 남을 수는 없잖아......
그때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나랑 결혼해.
나랑 같이 살아.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직 제대가 몇 달이나 남아 있었고,
대학을 2年 半을 더 다녀야 했다.
그 後 취직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전산과이기는 해도 기업체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지방 캠퍼스인데다가,
1학년때 성적은 바닥권이였다.
영어 실력도 빵점이였다.
그것을 보충할 다른 뾰족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였다.
그녀도 말이 없었다.
이렇게 이별하는 건가?
안되는데, 안 되는데......
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연락처라도 남겨줘.
제대하면 날마다 전화할께.
.......아냐,
안해도 돼.
왜? 왜 안된다는 거야?
그럼 편지는?
주소라도 가르쳐 줘.
편지는 하지 마.
헤어지자는 거구나?
내가 싫어졌니?
다른 남자친구 생긴 거야?
그건 아냐. 그녀는 말을 딱 잘랐다.
슬픈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유난히 핏기가 없었다.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몸도 무척 야위어 있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른 남자 생긴거, 절대 아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종화,
너 밖에 없어. 하지만
자세한 것은 묻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런데,
왜 전화조차 안된다는 거야?
나의 목소리는 다시 높아졌다.
그녀는 힘없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순간 그녀의 머리칼이 꽃힌
자그만 꽃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첫 휴가를 나갔을때
같이 거리를 거닐다가 샀던 거였다.
그녀가 입고 온 옷도
그날 내가 선물했던 거였다.
가지마, 제발 가지마.
가더라도 조금 있다가 돌아와줘.
날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나도 눈물이 치솟으려 했다.
그래,
언제까지라도 네가 돌아만 와 준다면...
나는 굳게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
그녀는 뜻밖에도 품에서
빨간색 3.5 인치 디스켓을 한장 꺼냈다.
그리고 내 손에 꼬옥 쥐어주었다.
여기 우리가 다시 만날
시간과 장소가 적혀있어.
나는 3年 뒤에 잠깐 귀국할꺼야.
그때 이곳으로 찾아와줘 ,
그러면 너랑 결혼하겠어. 정말이야?
나는 너무 기뻐 환성을
지를 뻔했다. 결혼이라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이 말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어. 뭔데?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물었다.
거기 내가 부탁한 것이 몇가지 적혀 있어.
꼭 그대로 해줘야 해. 알았지?
그래 알았어. 그럼 잘 있어.
나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주헌아, 꼭 돌아와줘 !
그때 만나! 널 사랑해!
........................
? 한글 3.0 의 암호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울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녀가 종이가 아니라
디스켓에 만남의 장소를 남겨둔 것이
이상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그보다 나는 오직 그 곳이
어디냐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일까?
아니면 첫키스를 나누었던 곳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몇달
안 남은 군대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컴퓨터라고는 286도 볼 수 없었던
말단 소총부대에 있었던 나는
제대할 때까지 디스켓을 열어보지 못했다.
오직 관물대 속에 소중히 넣어두고
행여나 깨질세라 조심스럽게 간직했다.
그리고 제대하기가 무섭게
나는 제일 먼저 집으로 뛰어 들어와
군복도 벗지 않고 컴퓨터부터 켰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가 준 빨간 디스켓을
드라이브에 집어넣었다.
뜻밖의 파일은 두개가 들어 있었다.
일단 둘다 하드에 카피했고,
곧장 아래아 한글 2.0 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내게 준 파일명은
FIRST.HWP 와 SJHR.HWP 이였다.
나는 FIRST.HWP 를 먼저 불러들였다.
아뿔사!
파일은 3 . 0 으로 저장되어 잇었다
나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실감하면서
부리나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축하주를 사준다는 놈들을 마다 하고,
3.0 버전을 갖고 있는 녀석을
수소문해서 부리나케 그의 집으로 갔다.
그와 인사를 대강 나눈 후
곧장 컴퓨터에 디스켓을 넣은 후
그 파일을 불렀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랑하는 종화에게 미안해.
나는 만날 장소는
다음 파일에 적혀 있어.
거기엔 암호가 걸려있는데
넌 그것을 풀어야만 나를 만날 수 있어.
암호는 영어 소문자로 입력되어 있어.
앞의 세글자는 내 이름의 약자 pjh 이고
그 다음에 영어 단어 하나가 있어.
아마 지금 이 글을 보는 너는
무척 실망하고 있겠지.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건 반드시
너 스스로 풀어야만 해.
나를 사랑한다면 직접 풀어줘.
하지만 만약 3年 안으로
풀지 못하면 포기하도록 해.
그땐 나를 잊는게 좋을거야.
그리고 토익을 800 점을 맞는다면,
이것을 푸는데 도움 이 될거야.
너의 천사 주현이가
일순간 나는 멍하게 있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잠시 후에 나는
무작정 SJHR.HWP 을 읽어들였다
혹시나 했지만 과연 암호를 넣으세요
하는 말이 떴다.
나는 무턱대고 pjhangel 을 쳤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어 pjhlove 을 쳤지만 역시 아니었다.
나는 당황했다.
정신없이 pretty, happy, marry 를
잇따라 넣어보았지만 모조리 아니었다
야, 큰일났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냐?
나는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문을 청했다.
하지만 그 친구 또한 별로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래아 한글 3.0의 암호를 푸는 방법은
아직 없어. 앞으로 언제 깨어진다는
보장도 없고. 무작정 찍으면
아마 슈퍼컴퓨터로 해도 수백년이 걸릴거야.
죽을 때까지 해도 가능성이 전혀 없을껄.
그럼 그녀가 불가능한 것을 제시해 놓고
나를 버리려했단 말이니?
아냐, 그럴리가 없어. 주현이는
절대 그럴 여자가 아니야.
나는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한참 후 친구녀석이 말했다.
맞아.
너를 속이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아.
만약 너를 속이려고 했다면
텅빈 디스켓을 주던지
앞의 세자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지 했을꺼야
'사랑하는 종화' 나,
'너의 천사 주헌' 같은 말도
안썼을 거고. 원수지고
헤어지는것도 아닌데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거짓말 할리도 없고..
종화야 그것보다 글이나 차분히
다시 읽어봐. 거기 무슨 힌트가 있을지도 몰라.
그래, 맞아 뭔가 힌트가 있을거야.
나는 차분히 글을 읽어보았다.
몇번을 읽다 보니 이상한 것이
두가지 눈에 띄긴 했다.
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반드시 내가 풀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토익점수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지만 당장 뾰족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SJHR.HWP 이란 파일의 뜻에
무슨 힌트가 있을까 했는데
그 뜻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해킹의 고수 ?
나는 그 다음날부터
당장 암호풀이에 들어갔다.
우선 제대 기념으로 부모님을 졸라
펜티엄 컴퓨터를 장만했고,
도스용 아래아 한글 3.0 을 깔았다.
그리고 글자를 입력시키는
수고를 덜기 위해 머리를 썼다.
어차피 앞의
세글자 phj는 밝혀져 있었다.
그것만이라도 자동으로 입력시키면
부담이 적다.
나는 한글의 매크로 기능을 이용해
누르면 바로 불러오기부터 pjh 까지는
입력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찍는 작업에 들어갔다.
bautiful, rose, fine, white,
happy, smile....
그 중 어느것도 아니였다.
나도 beautiful 과 같은
간단한 단어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그러면서도 우리 둘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래, 영화, 책 요리 할것 없이
그녀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SJHR 또한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낙담한 나에게 친구가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마. 아직 2年 半이란
기간이 있잖아. 그래도 명색이 전산과인데.
한번 ... 해킹 프로그램을 만들어봐.
어쩌면 그녀가 네 컴퓨터
실력을 테스트 해보는 것인지도 모르잖아.
그 녀석의 말을 듣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맞아 그녀는 전부터 내가 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와 했어.
아마 내가 직접 풀라거나,
토플을 잘하면 도움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해보라는 말같아 그래!
한번 직접 풀어볼거야.
반드시 풀어내고야 말거야.
내 결심에 친구는 박수를 보넀다.
잘 생각했다. 그런데 종화야,
어쩌면 SJHR 은
슈퍼종화 홈런이 아닐까?
뭐야?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튼 열심히 해봐야겠다.
그때부터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일단 서점에서 해킹에
관련된 책들은 모조리 구입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제일 컴퓨터 실력이
뛰어나다는 선배들을 며칠간 따라다닌 끝에
2.0 을 깨는 프로그램과 난수발생
프로그램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동안 혹시하는 마음에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이사를 간 後였다.
방법은 오직 암호를 푸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밤새 책을 보면서 연구를 했다.
낮에는 선배를 쫒아다니면서
노하우를 듣기에 바빴다.
좋아하던 술과 당구,
볼링을 모두 끊었고
TV도 영화도 보지 않았다.
먹고자는 시간을 빼면
오직 컴푸터와 씨름했다.
어느덧 나는 컴퓨터 실력이
부쩍 늘어가기 시작했다.
1年 半이 지났을떄 나는 이미
나를 가르친 선배들을 추월했다.
소설 잘쓰는 친구가 국문과 학점을
잘 받는 것은 아니듯이 학점은
보통이었지만, 해킹실력 만큼은
학교에서 첫째가는 고수였다.
나는 수많은 해킹프로그램의
소스를 분석했고 연습삼아
몇몇 게임의 락을 깨보기도 했다.
해킹 프로그램을 찾느라고
부지런히 돌아다닌 결과,
인터넷 또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는
초조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4개월 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주현아 보고 싶다. 어디에 있니?
난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 '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다가 지워버렸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왜 쓴단 말인가 ?
그러나 지운 순간 갑자기
후회스런 마음이 밀려왔다.
지우는게 아닌데 그래도 남겨둘텐데
그녀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나에겐 추억일텐데.
나는 백업파일을 찾아 편지를 복구했다.
그때 내 머리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혹시?
나는 빨간 3.5인치 디스켓을 꺼내고
프롬프트를 a 로 옮긴 후에
undelete 를 쳤다 잠시후 파일?
UNJOHR.HWP 을 복구시킬
것인지를 묻는 메세지가 떴다.
나는 예스를 눌렀다.
이 UNJOHR.HWP 는 예전에
삭제했던 파일을 복구한 것이었다.
예전엔 이런 파일이 있던 것이었다.
UNJOHR.HWP 는
아마 SJHR.HWP 의
처음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암호가 없을 가능성은 많아.
그런데 파일이 열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의 사랑 종화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
너를 속인거..
용서해줘. 하지만 그럴수 밖에 없었어.
너를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난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어.
만약 그 사실을 말하면
네가 군대생활 제대로 하지 못할까..
탈영 할까 봐서 어쩔수 없이
거짓말을 한거야.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어.
내가 죽을 목숨이란 것을 알면
넌 분명히 매일 술에 쩔어 살것 같았어.
그래서 일부러 암호를 장치하고,
그것을 풀게 노력하도록 유도한거야.
그러면 넌 아마 넌 그것을 풀기 위해
컴퓨터 공부를 열심히 할테니까.
토플얘기도 그래서 쓴거였어.
네가 이것을 읽고 있을때
나는 이미 죽고 없을거야.
내가 일부러 거짓말로
처음 세글자를 틀리게 가르쳐 줬으니까
아마 넌 한동안 헛수고를 했겠지.
하지만 연금술사가 金을 제조하는데
실패했어도 화학의 발전을 가져왔듯이 .
너의 컴퓨터 실력은
무척 많이 발전했을거야.
아마 이건 누군가에 의해
한글 3.0 이 깨어질때 풀리겠지.
어쩌면 그 누군가가
너일 수도 있을거고 ..
그랬음 좋겠다.
며칠 전에 신조혐려란 책을 읽었어.
한 여자가 자신이 죽으면 남자가
따라 죽을까봐 일부러 16年 後에 만나자고
거짓말을 남기고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팠어.
그럼 열심히 잘살고 하늘나라에서 만나.
아니면 다음 生에서...
우린 그땐 절대로
이렇게 빨리 해어지진 말자.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해.
너만을 사랑했던 주현이가..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