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지에서 현지 바이어를 감동시킨 김대리
아침 저녁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올 광복절 휴가 때가 불현듯 떠오릅니다.
입사 첫 해에 눈치 없이 광복절 연휴 끼고 9일 휴가 다녀왔다가 선배들한테 물정 모르는 놈으로 찍혀 한참 고생한 이래 처음으로 꽤 긴 휴가를 받았습니다. 아내 덕분에 이번 휴가는 제 2의 신혼여행이 됐습니다. 아내가 다니는 외국인 회사에서 우수 사원으로 선정돼 3박4일의 괌 여행권을 받았기 때문이죠. 마누라는 잘 두고 봐야 합니다. 괌에 갔다 와서는 강원도 인제의 깊은 산골에 틀어박히기로 했습니다. 대학 선배가 펜션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열대의 해변과 울창한 강원도 산골.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하여간 우리들의 1주일은 속세는 아닐 것임에 분명했습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잔뜩 멋을 부린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완벽 장착한 아내와 시원스런 반바지에 하와이언 티셔츠를 입은 저희 부부는 보무도 당당히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탑승 수속까지 마치고 저는 부장님이 말씀하신 발렌타인을 사러, 아내는 화장품을 고르러 면세점으로 향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강차장님이었습니다.
“아이고 아직 출발 안했네? 다행이다. 어 다른 건 아니고. 자네 핸드폰 로밍은 해 가는 거지? 뭐 휴가 때 별 일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연락은 돼야지.”
대답은 네 네 그러문요 하면서도 속은 갑갑해 옵니다. 이 강차장이라면 휴가를 달나라로 간다고 해도 전화해서 뭐뭐 어디 있나 물어 볼 위인이 되고도 남거든요. 그런데 강차장은 전화를 끊을지 모릅니다. “어 그래. 그리고 그 뭐라나 유료 데이터도 신청해 가. 문자나 전화는 비싸니까 카톡으로 하면 공짜잖아? 휴가 잘 다녀오고. ”
낌새를 알아챈 아내가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합니다. “무슨 회사에서 휴가 가는 사람 붙잡고 연락이 되니 카톡을 하니 마니 그래?” 뭐 그래도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던 저희 부부는 생동감 넘치는 신혼부부로 돌아갔습니다. 비행기가 날아오른 뒤 아내는 행복감에 젖었고 망망대해를 굽어보면서 신선이 된 듯 여유 작작 괌에서의 신선놀음을 설계하고 있었지요.
괌에 도착해서 호텔 체크인을 하고 호텔 풀장에서 능숙한 접영으로 주변의 부러움과 찬탄의 시선을 느끼며 어깨 으쓱할 때만 해도 좋았습니다. 뷔페로 저녁을 늘어지게 먹고 아내와 와인 한 잔을 하고 핑크빛 분위기에서 호텔방에 들어올 때까지도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와서 두고 나갔던 핸드폰을 들여다본 순간 얼굴이 흙빛이 되고 말았습니다. 카톡이 수십 건, 회사 번호 역시 그 정도 수가 찍혀 있었던 겁니다. 동료 최대리부터 강차장, 그리고 나중에는 부장님, 급기야 마지막 카톡은 상무님의 것이었습니다. “김 대리. 확인하면 내게 연락 좀 줘. 늦어도 괜찮네. 기다리겠네.”
동료 최대리에게 일단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카톡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바로 험한 말이 날아오더군요. “야 임마 휴가면 다냐. 말레이시아 계약 건이 날아가게 생겼어. 너 그쪽에 선이 있다고 했잖아. 거기 연락처 좀 알려고 그렇게 연락했는데.....” 저절로 이마에 손이 갔습니다. 아이고 두야. 상무님께는 카톡으로만 답을 드리기가 뭐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끊으려고 했는데 상무님은 연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지만 빨리 선 대서 조치를 취하라는 말을 다섯 번은 반복하십니다. 글쎄 상무님 좀 끊자니까요 소리가 목구멍에서 간질간질했지만 제가 죽으면 죽었지 그 말을 뱉을 수는 없지요. 무수히 카톡을 주고받고 카톡을 확인 안하는 경우 전화를 돌려가면서 말레시아 기업 한국 지사원으로 있는 대학 후배들과 말레이시아 현지의 우리 직원과 연결시키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그 경과보고까지 카톡으로 하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로맨틱한 밤을 고대하던 아내는 이미 코를 골고 자고 있더군요.
다음 날도 저는 불안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습니다. 스노쿨링을 하면서도 핸드폰을 배 위에 두고 수시로 확인했고 카톡을 퍼부어댔습니다. 밥도 핸드폰을 식탁에 두고 먹었습니다.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게 아니라 제 스스로 불안해진 겁니다. 휴가 온다고 일사천리로 처리했던 일들의 허점이 아차 떠오르고 연락해야 할 곳들이 연속부절로 떠오른 겁니다. 여자들이 나오면 집 가스 잠갔는지, 수돗물 틀어놓고 나오지 않았는지 전등이 켜져 있는 건 아닌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을 한다더니 조금씩 미진하게 두고 나온 일들이 무슨 오락기 두더지들처럼 머리 속에서 뿅뿅 하고 튀어 올라오지 뭐겠습니까. 결국 아내와 저는 대판 싸우고 말았습니다. 아내 심경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를 이해 못해 주는 게 야속하기도 했지요. 당신 남편이 이러고 먹고 산단 말이야!
그래도 세 번째 날은 좀 홀가분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회사 사람들도 양심이 있는지 연락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날 밤을 신혼부부답게 보내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데 만찬 와중에 카톡이 그 경망스런 소리를 냅니다. 영업2부 윤과장의 장문의 카톡 이었습니다. “휴가 중인데 정말 미안합니다.”로 시작해서 “중요한 내용이니 꼭 검토 바랍니다.”로 끝나는, “스페인어 하면 김대리이니 꼭 도와주십시오.”가 용건인 카톡 이었습니다. 이메일로 봤더니 이건 스페인 사람들이 독해하지도 못할 엉터리 스페인어가 천지입니다. 스페인어 잘한다고 큰소리치던 영업2부 신입사원의 실력이 들통이 난 거죠. 윤과장도 뭔가 이상하다 싶어 제게 이메일을 보낸 겁니다. 이건 핸드폰 상으로 수정할 문제가 아니라 컴퓨터가 필요했습니다. 다급하게 아내에게 “우리 노트북 안 가져왔지?”를 물었을 때 아내가 지은 표독한 표정을 저는 길이길이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표독함을 무시하고 방을 뛰어나가 일정을 함께 했던 한국인 여행객 방문을 거세게 두드렸습니다.
“저 박선생님 실례합니다. 노트북 가지고 오셨다고 했죠? 오늘밤 하루만 빌려 주시겠습니까?”
괌의 여름밤은 깊어갔습니다. 표독한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한 채 눈물 자국마저 비치는 아내도 꿈나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때 아닌 스페인어 계약서를 완전히 다시 쓰다시피 하며 괌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정규 계약서를 수정 완료한 후 멕시코 현지의 카운터 파트에게 보낼 보충 설명 메일을 쓰던 중 저는 가이드에게 들은 얘기를 다음과 같이 끼워 넣었습니다. “1521년 스페인 함대를 이끈 마젤란이 기나긴 항해 끝에 처음으로 발견한 괌 섬에서 휴가 중 이 메일을 쓰고 있습니다. 이 계약이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아니 휴가가 끝날 때까지 아내는 제게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여행도 당연히 취소였습니다. 하릴없이 나와 이곳저곳을 쏘다니기도 했고 아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도 해 봤지만 무위였습니다. 그렇게 결혼 후 첫 휴가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회사로 복귀한 날 상무님이 저를 호출하셨습니다. 아이고 이럴 때 휴가 갔느냐고 한 소리 듣겠구나 했는데 상무님은 들뜬 목소리로 저를 안을 듯 악수를 청하시더군요.
“김대리! 자네가 괌에서 보낸 메일이 현지 바이어를 감동시켰다더군. 아 정말 휴가지에서도 한몫을 하다니 정말 훌륭해! 윤과장이 자네를 꼭 칭찬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더라니까.” 크게 한숨이 나왔습니다. 괌에서의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더군요. 아직 아내의 화는 풀리지 않았고 얼마나 아양을 떨어야 할 지 모르나 그래도 상무님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하고 싱글싱글 웃음이 나왔습니다. 스스로 참 속없다 싶더군요. 그러나 어찌합니까.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직장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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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줄 요약: "니들은 휴가도 없는 노예야"
[출처] 휴가지에서 현지 바이어를 감동시킨글 김대리|작성자 Mrㅡ무
출처 | http://blog.naver.com/molab_suda/220509692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