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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만든다. 우리동네 교통사고.
게시물ID : menbung_174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트라이윤
추천 : 10
조회수 : 962회
댓글수 : 46개
등록시간 : 2014/12/12 07:46:08

바보같이 허리를 삐끗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매섭게 추운 날씨에도 혼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가까운 병원까지 발바닥 반 만큼의 보폭으로 간신히 걸어왔는데, 

평소 몇 분이면 갈 거리를 몇 십분만에 간 것 같아요. 허리를 숙여 택시를 탈 엄두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4인실의 사람들은 대부분 교통사고 환자였고, 저마다 환자의 예의로 각자가 어떻게 다쳤는지를 간단히 설명했지요. 

그런데 어제 한 분이 나가시고 비어있던 침상에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들어오시는 발걸음이 무슨 행진을 하듯 저벅저벅 힘찼고, 그분이 내려놓는 짐들까지도 힘차게 침대에 착륙했지요. 

도대체 어디를 다치신 거지? 하도 멀쩡해 보여서 아저씨께 여쭤봤더니 

정말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이야기가 시작되더군요. 


아저씨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여느날과 다름 없이 그냥 길을 걸어가고 계셨는데, 

마침 주차를 했다가 후진해서 나오는 자동차와 부딪혔습니다. 


거기까지 듣고  저는, 고작 그정도의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신 건가? 생각했습니다. 

뒤에서 아주 살짝 받아도 뒷목 잡고 입원하는 나이롱 환자들 많잖아요.

하지만, 아저씨를 입원시킨 건 '자동차'의 충격이 아니라 '말 한마디'의 충격이었습니다. 


한 아줌마가 차에서 내리더니 차에 부딪힌 아저씨에게 건낸 

첫마디는

"어휴, 죄송해요!"나 

"저... 괜찮으세요?"나 

"어디 다치신데는 없나요?"같은 

일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아저씨, 보험사기단 아니에욧?!!!" 

이었답니다. 

병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깊은 탄식을 내뱉었지요.


어쩌면 그 아주머니의 첫마디를 듣는 순간, 

아저씨의 마음은 벌써 병원에 도착해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저씨는 아줌마와 계속 실랑이를 하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112를 누르셨고, 

잠시후 도착한 경찰관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저런 분은 말로는 안 된다며 아저씨는 그냥 입원하시라고 충고하더랍니다. 


그렇게 내가 있던 병원에 입원하신 아저씨는 혈색 좋은 얼굴에 어떤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이셨고 내게는 인품도 좋아보였습니다.  

만약 그 아줌마가 일상적인 선택지 1, 2, 3번 중 하나를 첫마디로 골랐더라면 

그냥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괜찮아요 허허허 하시고 끝났을 것이라는 확신이 90% 정도 들었습니다. 

아저씨는 이제 합의해줄 생각이 없어보이시지만요. 

뭐 금액이 그리 크진 않겠지만, 아줌마의 생활에는 여러 어려움이 피어나겠죠. 


지금 떠들썩한 대한항공 땅콩사건도 그렇고, 동네에서의 작은 교통사고도 그렇고 

삶 속에 불쑥 다가오는 사건들에 일상적인 말로 대답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란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범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말들이 뻔하고 상투적인 것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속에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최소한의 기품이 적은 양이지만 차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 속에 담긴 몇 방울의 '사람다움'이 천냥 빚을 갚거나 빚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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