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기억하는 나의 우둔한 기억력은 대체로 질이 나빠서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 한 명에 음악 한 곡을 대입하는 버릇을 가졌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어떤 친구를 만나다가 같이 들었던 음악 한 곡을 그 친구가 좋아한다면 나는 그 친구 모르게 그 친구의 이름과 곡명을 내 마음에 심어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유난히 좋아하던 어떤 친구 이름으로, 이제는 연락이 안 되는 그 친구와의 기억을 나는 유순하게 소환해 보는 것이다.
기억에도 리듬이 있다.
이유 없이 그 사람을 보고 싶을 때 모르게 짝 지어줬던 음악을 나는 반복해서 재생하는 것이다. 듣다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그 사람의 이목구비를 복원해주고 같이 갔던 공간을 복구해주고 같이 있던 시간까지 소환해준다. 반대로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문득 그 음악이 들려오면 나는 그 음악에 홀연 잡아먹혀 그 사람이 잡아끄는 기억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기억과 그 사람과 음악과 같이 노는 것이다. 게으르게 노는 것이다.
고통이 리듬을 타면 그것이 음악이다. 이 문장은 대학교 4학년 때 대학문학상을 어쩌다 받고 내가 수상소감에 썼던 문장이다. 그때는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른다. 하지만 어떤 기억이든 고통이든 불행이든 그것이 리듬을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는 겨우 그 리듬으로 그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 것 같다. 물고기에게 물이 그러하듯이 또한 나무에게 공중의 공기와 햇빛이 그러하듯이
그래서 어제 나는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 모르게 음악 한 곡을 그 사람 모르게 선물해줬다. 가수 윤하가 리메이크한 <오직 너뿐인 나를>. 오로지 라이브 버전으로만 이 노래는 들을 수 있어서 그 사람을 훗날 기억하게 된다면 이 가수의 라이브 무대처럼 어떤 떨림과 어떤 ‘날 것’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사나운 기억들도 음악 안에서는 유순해지니까 기억에도 리듬이 있으니까
사는 일은 라이브니까 삶이라는 무대에서 떠는 일은 당연한 것이고 그 떨림이 피부로 남을 때까지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이른 금요일 저녁 나는 카페에 앉아서 액정 너머로 물끄러미 노래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어보는 것이다. 이렇게나 작은 평화로도 삶은 문득, 충만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