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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의 기록
게시물ID : menbung_569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박진성
추천 : 4
조회수 : 3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2/14 04: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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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작년 초가을에는 무작정 떠돌았었다. 계획 없이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이 유일한 계획과 목적이었던 시간들. 어느 늦은 밤, 가벼운 소란이 있었다. 충북내륙지방의 소읍, 낡은 여관 입구에서 방을 하나 달라는 낡은 행색의 나와 방은 있지만 당신에게는 못주겠다는 중년의 여자와 그렇게 십 분 넘게 서로 버티고 있었다. 근방의 여관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여자 쪽에서 볼 때 나의 행색은 틀림없이 그곳을 자살할 곳으로 택한 사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근처에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요일의 가는 비 오는 늦은 밤, 사내 혼자서 투숙하기엔 아무래도 그곳은 무언가 찜찜한 데가 있었다.     

  방값을 두 배로 주고 겨우겨우 중년 여자에게서 102호 키를 받아들었다. 카운터와 가장 가까운 방이었다. 거울 속으로 흙빛 얼굴의 사내가 보였다. 그 여자의 공포와 두려움을 근심과 걱정으로 애써 번역하면서 족히 십 년은 넘어 보이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자신의 공포와 두려움을 확신하고 있는지 아니면 방값을 두 배로 받은 게 미안한지, 전화로, 마실 물이나 수건 따위가 부족하면 말하라고, 몇 시에 나갈 거냐고, 두 번이나 전화로 물어왔다.
     
  내쪽에서 생각해보면 가벼운 짜증과 별 걸 다 걱정한다는 원망의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 여자의 처지도 이해 못할 것은 또 아니었다. 아마도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 몇 페이지를 읽다 말고 낡은 침대에 누워 자그마한, 낡은 창문을 오래 바라보다 겨우 잠든 밤이었다. 실제로 그 작고 낡은 여관에서 누군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죽은 지 몇 시간 안 된 사람의 사체를 발견한 것은 아마도 그 여자였겠고 그 여자에게는 그게 또 어떤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들이 뒤따라 왔다.   

  죽은 직후에도, 죽은 자신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의 생채기를 남기는, 내가 모르는 어떤 삶에 대해 종종 생각해본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잡아당기며 누워 있던 밤. 좁은 창문으로 간간히 들이치는 옅은 불빛이 유령이 보내는 신호는 아닐까, 그런 공상도 문득문득 스쳐지났던 것 같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상처와 고통은 정말 끝이 없구나, 새삼스럽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뒤엉켜 좁고 낡은 방을 더 좁고 더 낡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힘들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그리고 내가 견디기 힘든 마음일 때, 종종, 그 여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나의 힘듦과 나의 고통과 나의 견디기 힘든 마음이 누군가에로 가서 상처가 되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조용히 나 자신을 다독이곤 한다. 
     
  그런데 그 낡은 여관과 그 여자는 그 자리에 아직도 그대로 있을까. 가을에, 조용히 찾아가봐야겠다.

  (2017.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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