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이번 강남역 사태에 문득 떠오른 개인적인 경험…
게시물ID : menbung_325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UGABAR
추천 : 1
조회수 : 34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5/23 11:40:58
옵션
  • 창작글
  • 본인삭제금지
벌써 몇 개월 전인가, 일 끝나고 집에 도착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때였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초등학교 5~6학년 쯤 되어보이는 여자애 둘이 있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는지 꺄르륵 깔깔 소리가 솔직히 말해서 1층 주민한테 폐가 되지는 않을까 싶을 만큼 요란했지만 어린애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짓거리가 없다는 걸 이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녁으로 먹은 올 엑스트라 라지 사이즈 와퍼 세트가 얹혔는지 뱃속이 심상치 않아 거의 꼭대기 층에서 미적미적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애타게 기다리던 차에, 문득 아까까지는 최대볼륨으로 떠들고 있던 여자아이들이 급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러나 싶어 애들 쪽을 쳐다봤더니, 두 아이들 중 한 명이 누가봐도 확실히 ‘나 지금 겁먹었어요.’ 라는 표정으로 얼어붙어있더라…같이 있던 다른 아이가 보기에도 이상했는지 창백해진 친구한테 말을 걸었다. 

“야, 갑자기 왜 그래?” 
“…남자가 있잖아.”

…순간 벙 쪘다. 그 동안 어디에서도 인상이 험악하다거나 성격 나빠 보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야 뱃속이 좀 심하게 불편해서 여차하면 이 게시판이 아니라 똥게에 남길만한 글을 쓰게 됐을지도 몰랐던 상황이라, 내 표정이 좀 안 좋았을 수는 있겠다 싶긴 했다. 

아무튼 내가 벙 쪄있는 동안 먼저 말을 걸었던 여자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자? 저 아저씨가 뭐?”

…아저씨라고 한 것에도 글래스 하트에 실금이 갔지만, 대충 봐도 나이차이가 있는 만큼 일단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대답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치만 남자잖아. 막 막 이상한 짓 하면 어떡해?”
“뭐?”
“남자는 무섭잖아. 막 때릴 거 같고, 엉덩이 같은데 만질 거 같고.”
“저 아저씨가 그러는 거 본 적 있어? 저 아저씨가 미친 것도 아니고 우리 아파트에서 왜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해?”
“그냥 남자니까 그럴 거 같아서 무서워. 남자잖아.”
“…별게 다 무섭다 야.  아저씨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콧방귀를 핀잔과 함께 날리며 태연하게 있던 여자애가 배꼽인사까지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그 바짝 굳은 여자애가 얼굴까지 창백해져선 한 말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은 나는 그저 입 안으로 웅얼거리는 대답밖엔 못해줬다.

여자애들과 나는 마침내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고, 얼어붙었던 아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눈에 띄게 불편해하면서 나에게서 최대한 떨어져 있으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자기 집인지 놀러온 친구네 집인지 1X층인 우리 집보다 닞은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말 그대로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 마냥 총알같이 뛰쳐나가서는 진짜로 무슨 일이라도 당한 사람 마냥 초인종을 연타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섭다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하랴. 나는 그저 지그시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러 이상할 정도로 겁을 집어먹은 여자아이의 눈 앞에서 사라져주는 정도 밖엔 할 것이 없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너 갑자기 왜 이러냐, 어디 아프냐 같은 말을 하면서 미안하단 얼굴로 다시 한 번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던 친구가,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됐다. 

집에 도착해, TV 드라마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투덜거림을 섞어 말씀드렸다.

“아저씨는 그런 사람 아냐~하고 말하지 그랬어. 요새 하도 세상이 뒤숭숭하니까 그런 거야.”
“…세상이 뒤숭숭하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해도 되나보네, 요즘은.” 
“워낙 미친X들이 많으니까 서로서로 조심해야지.”

멀쩡한 사람도 그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더러운 요즘 세상’에 대해서 농담 반 진담 반인 대화가 어졌지만, 생판 처음으로 마주친 한 여자아이가 내게 보인 겁먹은 표정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

그냥 요즘 강남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들을 보다가 갑자기 떠올라 써봅니다. 제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약간 각색? 소설처럼? 재구성했습니다. 

다행히도 속을 심히 괴롭게 만들었던 올 엑스트라 라지 사이즈 와퍼 세트는 무사히 화장실 변기 속으로 다이빙 했습니다. 
출처 내 기억.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