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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7 01: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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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올게."
의미없이 말해본다.
아무도 없는 단칸방에 말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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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도망쳤고 어머니는 죽었다.
하나남은 동생은 병에 걸렸다.
치료비는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난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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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포기했고, 나 자신도 포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구할 수 없었다.
발레화를 찢는 것은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나는 의외로 비싸게 팔렸다.
물론 나의 처음은 더 비싼 값을 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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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돈 봉투를 받았을 때, 나는 깨닫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기계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웃는 얼굴의 뭐든지 받아들일 뿐인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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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나는 울지 않았다.
정확히는 울지 못했다.
단지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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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비가 내렸다.
우산을 들고오지 않았다.
조금 손을 뻗어보았다.
차가웠다.
그리고 투명했다.
마치 나와 다른 무언가 같아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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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았다.
무언가 조금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 씻겨 내려갔으면.
모든 것이 다.
나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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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나는 쉬는 시간에 비가 오면 한적한 공원에서 찾아갔다.
아무도 없어서 빗소리만 나는 그 곳은
모든 것을 잊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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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그랬다.
그저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했다고 했었던가.
장마동안 모든 걸 씻어버릴 수 있을까.
돈도, 가족도,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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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무심한 목소리로 "왜 그러고 있습니까?" 하고.
그 사람은 우리 업소의 관리자였다.
그도 나를 알고 있을까.
나는 웃었다.
할 줄 아는 건 웃는 것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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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딘가 나와 닮았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도, 이 비를 좋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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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진부하지만
"좋은 날이네요."
하고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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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뒤로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비록 그는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우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가족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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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은 시간에
꿈같은 이야기.
나는 이룰수 없는 그런 슬픈 이야기들.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말
그런 시간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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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간들이 싫었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숨막히는 붉은 조명 아래에서 눈을 감는 그런 시간보다
어두컴컴한 아무도 없는 집에서 티비소리만 들리는 그런 시간보다
당연히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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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나는 그 시간이 소중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소중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점 나는 다시 사람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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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람같이 작은 소원을 빌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 비가 끝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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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늘 그렇듯 끝은 찾아온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장마는 끝난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다짐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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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역시나 찾아왔다.
그는 이 비가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어찌되었든 나는 그에게 이별을 말하려고 했다.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는 법이니까요. 같이.
항상 그랬듯이 무언가를 알려주듯.
이 비에 모든 것을 씻겨내리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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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먼저 나에게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고선 말했다.
뭐라 말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고백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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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세상은 어디까지 잔혹한 걸까.
이뤄질 수 없는 꿈인 것을.
꿈은 눈 앞에 있었지만 현실은 손을 잡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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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산 밖으로 나왔다.
비를 맞고 싶었다.
이 시간과 그와의 추억을 잊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눈물을 가려줄 것이 필요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가릴 것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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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를 걱정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웃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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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린 줄 알았건만.
모든 것은 빗방울에 씻겨내려간 줄 알았건만.
몸은 마음대로 움직였다.
옛날의, 행복했던 그 시간이 떠올랐다.
가족도, 꿈도, 행복도 있었던 그 때를.
그제서야 나는
잊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워 했다는 것을.
잊는 척 어디엔가 품어 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춤을 끝맞추고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의 행복한 듯한 웃음이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런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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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를 볼 일은 없었다.
그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왜 사라졌는지 알 기회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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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나는 그 공원을 찾아가지 않았다.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들을, 그 미소를.
그것을 곱씹으며 다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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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잔혹하게도 시간은 흐른다.
그 시간들도 점차 시간에 씻겨 사라져갔다.
손에서 흘러내리는 기억들은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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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웃는 얼굴이 희미해질 무렵
동생이 죽었다.
이제 끝난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시간도, 가족도, 소중한 것도.
정말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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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동생이 있었던 병실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렸다.
나는 그 공원으로 갔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정말 백지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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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은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옛날처럼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오랜만에 맞는 비는
차갑고 깨끗해서
여전히 나랑 다른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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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면 정말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워 하지 않고, 품어두지 않고
전부 잊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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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나왔다.
한 방울에 꿈을.
한 방울에 추억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흘러보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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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가 커다란 우산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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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그런 적이 있었다.
나는 거절했지만 그는 나에게 말했다.
언젠가 다시 우산을 들고 찾아오겠다고.
언젠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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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살짝 부끄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잊을 수 없네요."
나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그 말 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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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다.
행복했던 과거도, 끔찍했던 과거도.
결국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빗방울에 흘려보낼 수 없는 것이다.
눈물 한 방울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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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세상은 잔혹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언제든지 비는 내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듯이
언제나 행복할 권리가 있고
언제나 꿈꿀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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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웃고 있었다.
그 때 같은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의 손을 잡고선 진부하지만, 나는 말했다.
"좋은 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