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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6 23: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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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요지는 자유시장주의의 논지를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 글에 직접 반박을 하고 싶지는 않고, 가능한 논의를 좀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몇 가지 논점만 제시할게요.
1. 자본주의는 경제의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가?
-> 공유경제라고 불리는 경제체제가 있습니다. 이 개념은 자본주의의 아들뻘 되는 것으로, 예컨대 휴가 기간에 빈 집을 '대여하는' 것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즉, 공유경제 체제 하에서 집이라는 재화는 소유의 대상으로써의 의미보다는 이용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2015년 대전에서 열린 국제정상과학회의에서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제레미리프킨이 이 개념을 언급하면서 자본주의가 공유경제의 도래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해서 국내에서 잠깐 이슈가 된 적 있었죠. 이런 공유경제의 미래상은 사실 희망이나 자본주의의 대안 같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예정된 미래상에 가까운데요,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발달 아래에 기존에 서비스업에 해당하던 재화들 중 상당한 수가 이미 공유경제화 되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품, 영화 같은 것들 말입니다. 불법다운로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재화 자체가 소유 대상이 아니라 사용 대상으로 개념이 바뀌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음반을 통해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음반이라는 재화가 소유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여러 뮤직 어플들을 통해서 한달 몇천원 결제하고 그 음악들을 사용(소유 개념으로 접근한 게 아닙니다)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죠. 이런 변화는 개인적으로 매우 의미있어 보이는데, 이유는 자본주의가 맑스적 노동의 의미를 부정(이라고 하면 좀 거친 표현이지만)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맑스의 노동의 의미는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한 일의 결과입니다.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서 의자를 만들었다면 그 의자는 만든 사람의 소유물입니다. 맑스는 그게 노동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친다고 해봅시다. 선생님은 뭔가 노동을 했지만, 그 결과물은 선생님의 것이 아닙니다. 학생의 지식을 선생님이 소유할 수도 없고 학생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노동의 의미는 맑스적 노동과 차이가 큽니다. 특히 서비스업에서요. 그러한 '소유의 빈 틈'을 메워주는 것이 '돈'이었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노동의 대가로서 돈의 축적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공유경제가 다가옴에 따라 그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어요.
2. 적법한 '돈의 분배'는 것은 정말로 노동의 가치를 온전히 반영하여 공정히 분배되는가?
사실 이미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죠... 다만 더 나은 방법으로 분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를 내버려두는 것이지, 이 체제 역시 제대로 분배하진 못합니다. 예컨대 장하준 교수는 이런 비유를 한 적 있습니다. "인도의 버스 기사는 소와 사람들을 피해서 비포장도로를 곡예하듯이 달리지만, 아스팔트 잘 닦인 도로를 철저한 신호체계 아래에 주행하는 뉴욕의 버스기사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 굳이 세계 단위의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국내에서만 보아도 비교 불가능한 가치들의 충돌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가수가 4시간 짜리 콘서트를 한 번 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고 합시다. 반대편에서는 한 외과의사가 12시간에 걸친 고난이도 수술을 통해서 죽음이 확실시되었던 환자 한 명을 살렸습니다. 누가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할까요? 또, 마이클샌델 교수는 그의 저작에서 우연에 의한 능력의 발현을 꼬집습니다. 예를 들어, 장비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썩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이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장비는 삼국시대에 잘 나가는 장수였지만 현대에서는 힘 세고 무식하고 거친 남자일 뿐이죠. 마이클 조던이 만약 기원전 이집트에 태어났다면 그냥 키 큰 시민이었을 겁니다. 그 사회에는 '농구'라는 게 없거든요.
3. 자본주의는 특정한 형태의 사유구조를 조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 사유구조는 과연 옳은 것인가?
이 논점은 사실 제 개인적인 관심사인데, 자본주의라는 것이 도구이성과 책임의 자유라는 두 개념을 축으로 현대인의 사유구조를 지배하는 듯 합니다. 도구 이성이라는 것은 이성의 도구화이고, 이성에 의한 세계의 도구화를 의미합니다. 즉, 자본주의 체제하의 현대인은 세계를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간을, 더 충격적이게는 그 이성의 주인인 스스로를 도구화합니다. 이러한 도구화의 목적은 나 자신의 자기보존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만들어낸 신기루적인 성공의 이미지들에 도달해야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강박을 가진 채로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도구화해갑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데 너무 피곤해서 더 자고 싶다고 해봅시다. 도구이성은 재빨리 계산기를 두드릴 겁니다. 지금 출근하지 않을 때 책임져야 하는 대가(회사에서 징계 먹는 것)와 지금 출근할 때 책임져야하는 대가(아침잠의 포기)를 비교해서 손익을 계산하죠. 그리고 출근하라고 내 몸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내 몸은 그 명령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써 회사에 가죠. 이러한 과정은 내 이성을 통해서 철저히 행복한 내 삶을 계획한 결과이며 주체적인 판단이라고 옹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이성적인 판단으로 넘쳐나는 이 사회의 대부분의 시민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물어본다면 사실 우리가 주체가 아니라 뭔가 판단을 잘모한, 또는 어떤 강박을 갖게 된 이성의 도구로써 살고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판단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냐면, 그런 자유론을 우리가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떠한 책임을 지불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내 마음대로이고 따라서 나는 자유롭다라는 현대 자유주의의 원론이 우리의 자유관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실 '자유'라는 단어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 아니곘습니까. 실제로 아침에 나의 자유라는 것은, 출근하지 않고 회사에서 잘리지 않을 때만 온전히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건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회사가 사원들이 피곤할 때 자택근무를 하도록 원칙을 조정해주면 되죠. 요새 자택근무 많이 하니까요. 실제로 이런 식으로 인간의 (불가능했던) 자유가 확보된 게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거의 모든 것이 그런 자유들이죠. 예를 들어서 조선 시대에는 부산에서 한양 가려면 보름 동안 걸어가야 했습니다. 보름 동안 걷는 것은 '한양에 간다'는 결과를 위해 그들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5만원이면 몇 시간 안에 편안히 앉아서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엄청나게 줄었어요. 지불해야 하는 책임의 크기가 줄어든 것은, 그 줄어든 몫만큼을 역사와 사회가 부담했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서 매우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는, '개인의 자유'라는 것은 사실 사회적인 부분이 아주 큰 개념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국가 경제 계획은 이러한 자유도의 확대를 목표로 하거나, 최소한 그 방향을 이해하고서 계획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그렇지 않죠. 도구이성과 책임의 자유라는 개념은 서로를 보강하면서 완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합니다. 즉, 나는 책임을 지기 때문에 자유롭다라는 전제 하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내 이성을 통한 어떤 판단이든 주체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얻고, 그러한 판단력이 있기 때문에(책임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순환적인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아침잠과 사장의 징계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가 자유로운 이유는, 어젯밤에 이 상황을 예측하고 일찍 자야겠다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어젯밤에도 나는 판단하는 '도구 이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젯밤에도 나는 자유로운 주체였기 때문이죠. 그 이유는 어제 오후에도 어젯밤의 나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