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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0 01: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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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varez/
하긴 저 소설을 쓴 사람이 신채호선생이니 뭐라 하겠습니까만
신채호선생이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있을때도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이태리건국전, 독사신론 등의 기술에서도 한자로 삼국사라 합니다
더군다나 대한매일신보 국한본-1910 3월 11일자 논설 東國古代仙敎考- 에서도 한자로 삼국사 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대한매일신보-1910 3월 11자의 동양의션교에도 한글로 삼국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겨우 나흘뒤에 삼국사긔라니...허허허
참고로 어니스트 베셀은 1909년 5월1일 서거하시네요 투옥후 고문후유증으로... 일제로부터 많은 압력이 있었지 않을까요?
대한매일신보의 서양 발행인이 일제의 압력에 사망하고 거의 1년만에 발행인이 바뀌고 두달뒤에 일제의 관보화 됩니다
그렇다면 신채호선생은 어쨰서 삼국사라는 말을 갑작스레 삼국사기로 바꾼걸까요?
좀더 파고드니 이마나시류가 대한매일신보에 압력을 가했다고 보기 어렵더군요
그런데 그 시기즈음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1909년에 세키노 타타시에 의해 석암동 구분이 발굴됩니다 세키노는 고구려의 고분이라 생각했지만 얼마뒤 1910년 2월 도리이류조와 이마나시류에 의해 고구려가 아닌 낙랑의 고분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후로 일제는 임라의 유적을 찾기 바쁘죠 1915년 구로다의 글이나 1918년 이마니시의 글...
평범한 강사?였다던 이마니시는 몇년후에 일본최고의 석학들로 구성된다는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핵심인물이 됩니다
그간 그가 조사하고 연구했던게 조선사편수회와 딱 떨어졌기 때문 아닐까요?
이런 외부적 요인이 삼국사- 삼국사기로 바꿨다...라는게 기존논조인데 하루종일 생각해보니 그런것도 아닌듯 하네요
그렇다면 어째서 신채호 선생은 황성신문부터 대한매일신보까지 삼국사라 칭하다 나흘만에 삼국사기로 바꿨을까요
아마 그후로도 쭉 삼국사기라고 한것 같더군요 동아일보에 게재된 글들을 보니...
어째서 삼국사기는 실록에 삼국사로 더 많이 올라간걸까?(정덕본을 만들었다던 중종때도 실록엔 삼국사로 되어있네...)
신채호선생은 무슨 이유로 삼국사에서 삼국사기로 바꿨을까?
이마니시류는 무슨생각으로 삼국사기라고 했을까?
찾다보니 정약용도 김부식의 삼국사라고 했네요...흐음...
왜 그럴까요?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니 유사학자(에 넘어간 저 포함)들이 이마니시류를 끌어들였다고 생각도 됩니다(정보가 없으니 끼워 맞출려고..)
아무리 김부식이 삼국사기라고 진삼국사기표라고 딱 찍어 말했는데
어째서 실록엔 삼국사라고 더 많이 나오는것이고 정약용선생도 그렇고 신채호선생도 얼마간은 삼국사라고 했던데..
이유가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