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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2: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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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부터 틀렸습니다. 우리나라에 중도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유럽식의 정의인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정병기 교수의 논문의 결론을 인용해드리겠습니다.
<참고문헌>
김수행ㆍ정병기ㆍ홍태영, 2006, 『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영국,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개정판,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중략)
5. 중도는 가능한가: 발전적 종합과 실천의 미학
공간적 의미에서 단순히 양 극단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도는 의미가 없으며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모든 중도는 자신만의 내용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중도도 분명 인간의 발전을 위한 정치를 추구하고 그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무사안일과 현상유지만으로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적어도 올바른 중도이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는 갖추어야 할 것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보아 왔듯이 중간의 위치를 의미한다 하더라도 그 추구하는 바는 언제나 분명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좌익에서 추구한 중도든 우익에서 추구한 중도든, 언제나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양 극단을 지양하며, ‘개인의 자유를 토대로 하는 공동체의 발전’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도는 대연정과 같은 좌우 타협의 주도세력이 될 수 있었다.
둘째, 단순한 중간이나 절충적 종합이 아니라 발전적 종합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논쟁된 모든 ‘제3의 길’ 혹은 ‘중도’는 단순한 공간적 중간도 아니었으며 절충적 종합도 아니었다. 모든 주장들은 내용적으로 ‘발전적 종합’을 지향했다. 중도의 진정한 의미는 양 극단에 대해 철저히 알아야만 정립될 수 있다.
셋째, 극단을 지양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비판성을 가져야 한다. 현실을 비판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퇴보이며 역사적 정의에서 도태되는 수구적 의미의 보수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역사의 흐름이라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배를 상상해 보자. 전쟁이나 분열, 부정부패나 혼란과 같이 역사의 흐름이 때로는 올바르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배의 사공이 우리라고 한다면, 적어도 잘못된 강물의 물살만큼이라도 노를 저어야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그 흐름의 현실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잘못된 흐름을 수구적으로 지켜나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관성 있는 실천력을 담보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중도가 처음 의도했던 발전적 종합을 지켜나가지 못하고 체제적응의 길을 좇아간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양 극단의 탄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좌초된 경우도 있지만, 의지의 부족이나 권력 추구에 의해 스스로 포기된 경우도 적지 않다. 실천성을 담보하는 것이야말로 마지막으로 언급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내용만이 아니라 현실로 존재할 수 있는 중도적 정치세력은 이러한 실천성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요약을 해드리면..
첫째, 중간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그 추구하는 바는 언제나 분명한 내용이 있었다. 반면 안철수와 같은 작자는 항상 두루뭉실 했습니다.
둘째, 절충적, 단순한 중간을 표방하지 않아야 하고 발전적 종합을 지향해야하지만 안철수와 같은 중도는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중도라고 볼 수 없고 기회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마지막 단락에서 일관성있는 실천력을 분명히 언급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던 중도세력과 안철수까지 일관성있는 실천력이 있던 적은 안타깝게도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정치적 중도는 허상에 가까우며 악취나는 썩은음식을 보기 좋게 포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