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토성부터 시작해보죠. 대체 여기서 말하는 역사서 어떤 역사서에요? 역사논문에서 삼국사기나 후한서, 당서, 삼국유사라고 안하고 "역사서"라고 하면 대체 그게 무슨 책인지 대체 어떻게 압니까? 이거 읽어는 보셨어요? --- (1) 역사서에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 하였는데 만약 대동강을 패수로 본다면 그들이 낙랑군의 치소로 조작한 토성은 패수(대동강)의 남쪽에 있어서 왕검성이 될 수 없다.' (2) 역사서에 '왕검성은 물이 깊고 험하여 공격하기 힘들다' 하였는데 이 토성은 물이 얕고, 나즈막한 구릉에 위치하여 적의 공격이 용이하다. (3) 이 토성은 동서 709미터, 남북 599미터, 면적 396,650평방미터(약 만평)인데 기록에 의하면 낙랑군 치소는 가구가 62,812호이고, 인구가 406,748명이었다 함으로 이곳은 이를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좁다. ---
낙랑을 식민지로 파악하는 한심한 자칭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국편위의 입장. 기술과 행정수단이 현대에 비해 훨씬 미비한 고대에 현대와 같은 식민지는 가능하지도 않았음. 현대식민지를 2천년전 넘은 과거 고대로 투영하며 생기는 착각.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nh_004_0030_0020_0040_0020&fileName=nh_004_0030.pdf#page=68 한군현은 물론 후대 사료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중국의 통제와 관리의 파견 등에 의해 직접적 통제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그러나 낙랑을 제외한 3군이 설치된 후 20여 년만에 폐지되거나 축출되었다는 사실은 이들 군현이 기왕의 고조선 전체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직접 통제를 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이들 가운데 낙랑군만이 위만조선의 일부지역에 한정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또한 그 존속기간이 길었던 낙랑군에 대해서도 종래에는 초기의 낙랑군의 성격이 소멸될 때까지 시종일관 유지된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낙랑군은 중국의 직접통치를 받는 군현적 성격을 띄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성격은 전한시대에 한정되며, 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은 중국계 유이민집단의 자치도시적 성격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
특히 후한대에는 고구려 등의 성장에 의해 더 이상 기왕의 고조선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韓․濊․倭 등의 세력과 朝貢貿易(조공무역) 등의 중계지로서 기능하면서 점차 그 세력이 축소․해체되었다.
그러므로 낙랑 등의 존재는 정치적 의미에서 평가되기보다는 文化中繼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15000/2007/04/021015000200704260657014.html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 이른바 낙랑 호구부 목간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는 본래 3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戊辰)년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國人)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檀君)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 되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 되었다.
41대 후손 준(準)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이투데이 기사 긁어오면 그게 사실이 되요? 저거 각 인물별로 그 책 확인해보셨어요? 조선일보나 한겨레, 동아일보도 역사관련 기사 자주 검증에 걸리는데, 이투데이가 기사 쓰면 다 많는 말임? 무슨 학문을 이따위로 하세요? 저 링크 원문 따다 확인한거 못보셨어요? 삼국사기나 한국고전종합 DB 이런거 조사해서 긁어와요.
붙인거 다시 한번 재활용 추가로 정리하면 세종실록지리지 편찬한 학천 윤회(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D%9A%8C_(%EC%A1%B0%EC%84%A0), 정약용, 안정복은 식민사학자. 그 양반들이 식민사학이 뭔지나 알까? 아니 독립운동가가 주장하면 사실이 된다는 주장은 대체 어디에서 배운거임?
그리고 복붙을 해도 성의를 가지고 하심. 여전히 링크 안붙이고 주장이라고 쓰는 버릇 못고치고 있음. 그 말을 진짜로 했는지 안했는지 대체 뭘로 확인하나? 그걸 교차검증이라고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da&pos=4&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2%99%EB%9E%91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 낙랑에 대한 기록
http://kostma.korea.ac.kr/riks/sub6/sub6View.do?base_uci_no=1062 / 정약용 아방강역고, 낙랑군의 치소는 본디 조선현에 있었는데, 조선현은 즉 지금의 평양이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layout/contentsIframe.jsp;jsessionid=n4NcQLNd8hjycQdHtWVCWGKVBJ9zTJMgtvBBdQnNhKvVQjmJLQlV!-2018665117%3FbizName=MK%26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253FbizName=MK%2526seojiId=kc_mk_c007%2526gunchaId=ax004%2526finId=009 / 안정복 동사강목, “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 하였다. 지금 평양을 낙랑이라고 칭하니 그 유래가 오래다.
불쌍해서 도종환 후보자 한사군 얘기한거 근거 들어드립니다. 전 본문에 위나라 황해도 그런 얘기 안했으니까 뇌망상 그만하시구요.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da&pos=4&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2%99%EB%9E%91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 낙랑에 대한 기록
http://kostma.korea.ac.kr/riks/sub6/sub6View.do?base_uci_no=1062 / 정약용 아방강역고 낙랑군의 치소는 본디 조선현에 있었는데, 조선현은 즉 지금의 평양이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layout/contentsIframe.jsp;jsessionid=n4NcQLNd8hjycQdHtWVCWGKVBJ9zTJMgtvBBdQnNhKvVQjmJLQlV!-2018665117%3FbizName=MK%26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253FbizName=MK%2526seojiId=kc_mk_c007%2526gunchaId=ax004%2526finId=009 / 안정복 동사강목 “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 하였다. 지금 평양을 낙랑이라고 칭하니 그 유래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