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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3 18: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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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봤는데 그마저도 이승만은 까일만 했다는 내용인데요?
->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나온 상황에서 외교독립론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안창호 측이 미국의 선의에 기대서 청원서를 제출한 것은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었으며 장래 조선의 완전한 독립 보장 및 통치 기간 동안내치, 통상의 자유 보장을 통한 실력 배양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에 한민족이 일제의 통치를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시 이승만은 지분도 적었으며 오히려 사인했을 당시에도 위임통치 청원에 관심이 없었다.[21] 대한인국민회 총의장이었던 안창호, 국제법 고문들, 한중의 독립운동 세력,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등 여러 세력들과의 논의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주도 세력인 안창호는 3.1 운동 이전에 했던 것이며 오히려 독립운 동노선에 대한 생각이 3.1 운동 이후 수정되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적극적인 투쟁 노선으로 전환했다.[22] 그러니 실제로 안창호의 위임통치 청원에 문제를 제기한 인물들은 반임정 세력에서도 소수였다. 당시 반이승만파들도 위임통치의 실상을 알아서 안창호가 관련됐다는 건 알고 있었다.[23] 국민대표대회 당시 " 3·1운동 이전"이니 인정해 준다거나 "안창호가 위임통치와 관계가 있어도" 인정해 줘야 한다며 그와 무관하게 안창호를 인정 해줘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24] 그에 비해 이승만은 3.1 운동 발생 후 오히려 지분도 적었으면서 3월 16일에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면서 이 청원을 마치 자신이 주도했던 것처럼 선전했다.[25] 안창호와 이승만의 차이는 3.1 운동 전이냐 후냐의 차이였다. 거기다 본인이 주도한 것처럼 선전까지 했다.
이승만은 원래 지분도 없었던 주제에 본인이 주도한 것처럼 언론을 통해 선전했으니 비난의 표적이 됐다. 조국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총 들고 투쟁하던 사람들은 배신 행위로 해석했고 그 주체를 이승만으로 해석했다. 이승만이 본인이 주도한 것처럼 언론에 선전했던 위임통치 청원은 무장투쟁론자, 급진론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러나 이후 임정 분열은 이 구도대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당장 옹호파(이승만, 김구 등), 개조파(안창호, 이동휘 등), 창조파(박용만, 신채호, 김규식 등) 구도만 봐도 외교노선, 무장투쟁노선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고 오영섭의 논문에서도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