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69
2017-10-31 23:19:24
0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아주 짧은 소나기가 스쳐갈 거라던 예보는 언제나 그렇듯 거짓말이었다.
준호는 발코니의 큰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빗방울이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를 몸으로 느꼈다. 온갖 이성과,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듯 보이는 그에게도 그런 순간은 필요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으니.
그러나 준호의 이지적인 면만 보아온 사람들은, 그가 맨발로 흙을 밟거나 오늘처럼 빗소리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큰 낯섦을 느꼈다.
윤희처럼.
[드르륵]
유리창에 부딪혀 흩어지는 빗방울의 단말마 사이에 전차가 굴러가는 듯한 소음이 섞였다.
“감기 걸리려고 작정을 했지?”
짧게 친 숏 컷. 윤희는 한쪽 어깨가 다 드러나는 긴팔 옷을 입고 창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감기 걸리는 건 너겠지. 봐, 난 긴팔 긴바지라고.”
준호는 씨익 웃으며 소매를 끌어당겨 윤희에게 보였다. 윤희는 유치하다는 듯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커피?”
“좋지. 어디에서 온 원두인가요?”
“원두는 무슨. 믹스 커피야.”
준호의 너스레에 윤희가 이를 드러내며 눈을 찡그렸다.
잠시 후, 주방으로 사라진 그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발코니 창틀에 딱 붙여 놓은 작은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고, 준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준호는 윤희가 타온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다시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윤희는 턱을 괴고 지루한 표정으로 준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턱을 받친 손을 바꾸던 그녀가 한 팔을 테이블 위에 쭉 뻗으며 엎드렸다. 유심히 준호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거 버리고 벤치 사면 안 돼?”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빗소리를 즐기던 준호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벤치...? 벤치는 갑자기 왜?”
“...”
준호는 윤희가 머그컵 손잡이를 쥔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가 벤치를 원하는 이유를 빠르게 이해했다. 그녀는 언제나 네 명이 앉는 자리를 좋아했다. 적당한 자리가 없으면 차라리 카페의 창가에 붙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마주보고 앉는 자리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차라리 침대는 어때? 그게 더 낫지 않겠어?”
“멍청이.”
윤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뭐, 맨날 머릿속에 그것만 있는 줄 알아?”
“그게 뭔데? 난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있는 게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한 것뿐인데?”
윤희의 입술이 언덕모양을 그렸다. 눈이 큰 탓에 흰자위가 더 허옇게 번뜩였다. 준호는 윤희를 골려주었다는 생각에 키득거리며 웃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악!”
고통은 계속 이어졌다. 윤희가 손톱 끝으로 준호의 손톱 뿌리 부분을 강하게 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준호는 머그컵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끙끙대며 휴전을 제안했다.
“말로 하자... 말로...”
“말로?”
준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윤희는 그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가끔은 말보다는 실력행사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윤희의 고문은, 준호가 먼저 침대로 가자는 말을 꺼낼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