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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23: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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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쉬는 날에 책만 봐?”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윤희가 말했다. 읽던 책을 시야에서 슬쩍 치운 뒤 윤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짧게 친 숏컷 옆 머리 몇 가닥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입술이 잔뜩 튀어나온 것을 보니 이유는 몰라도 못마땅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왜, 또 실습이라도 하게? 오늘은 하루키 아니야. 아얏!”
다리에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아이고, 내 머리카락인 줄 알았네. 뭐가 이렇게 꾸불꾸불해. 징그럽게.”
완전히 심통이 난 상태였다. 그녀가 바라는 게 무언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녀가 나를 졸라대는 건 주말뿐이다. 평일에는 본인이 피곤한 건지, 아니면 나를 배려하는 건지 필요 이상으로 달라붙지도 않는다.
짓궂은 마음이 생겼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속으로 불만을 삭이고 있는 그녀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나머지 조금 더 골려보기로 했다.
책의 내용을 눈으로 좇는 것은 벌써 포기했다. 가름끈을 읽던 곳에 끼워두고 최대한 눈을 내리깔아 윤희의 움직임을 살폈다.
반응은 금방 찾아왔다. 윤희는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몸을 튕겨 올리며 일어났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책 모서리로 그녀의 머리를 강타할 뻔 했다.
입술에 잔뜩 힘을 주고 웃음을 참았다. 순간, 가름끈이 놓인 부분에 손가락 두어 개가 난입했다. 윤희는 강하게 책을 끌어내려 내 얼굴을 찾았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 거야?”
“어... 음... 역설에 관한 거랄까...?”
오밀조밀 귀여운 이목구비 한 가운데 어울리지 않는 굵은 세로 주름이 패여 있었다. 입술은 언덕모양. 어쨌든 그녀도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이어가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역설이 정확히 뭔데?”
“음... 그게 좀 설명하기 어려운데...”
“맨날 어려운 책 읽으면서 그것도 설명 못해? 바보 아니야?”
“음...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그건 그냥 좀비잖아.”
윤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야말로 내 지적 능력을 의심하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적절한 예시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흔히 들어보았음직한 예시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음...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로는...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정도가 될 거 같은데.”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윤희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주변 상황에서 그 이유를 찾다가 허겁지겁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이렇게 말했었다. 바람피운 전 남자친구의 마지막 말이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였다고.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입을 벌려봤지만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윤희는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조심스레 책을 덮어 옆에다 내려놓았다. 최적의 방어태세를 갖추기 위해서. 그녀의 주먹은 매섭다. 남아있던 아이스크림 반통을 다 먹어치웠을 때 깨달은 교훈이었다.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삐죽거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주 잠깐 동안의 작은 경악이 사라진 뒤, 그녀의 입가에는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매를 벌지?”
“음... 인정...?”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글쎄... 나가서 근사한 외식이라도 할래?”
“10대 이상 맞으면 사은품으로 세 대 더 따라가는 거 알고 하는 소리야?”
“인심 한 번 후하네.”
“벗어.”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건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언제나 놀라운 건 그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윤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크게 한숨을 쉬고 안경을 벗은 후 티셔츠 끝자락을 쥐려는데, 그녀가 내 팔목을 재빠르게 붙잡았다.
“아냐, 내가 할래.”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야?”
“오늘은 네가 나한테 잘못했어. 그러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돼.”
“이미 벗으라고 명령했잖아?”
“몰라, 몰라! 넌 말이 너무 많아!”
윤희가 느닷없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자기 입술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와 동시에 티셔츠 자락 안쪽으로는 서늘한 손가락들이 밀려들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노도와 같은 적들의 진격에, 나는 코로 숨을 쉬는 것에만 집중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