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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00:33:37
4
"아주 거슬려."
윤희가 내 늘어난 티셔츠 목부분에 손가락을 넣으며 말했다. 차가운 그녀의 손 끝이 쇄골을 스친 뒤 대흉근이 만들어 내는 곡면을 따라 미끄러졌다.
변온동물의 살갗이 스치는 듯한 감각이었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가느다란 뱀은 먹잇감을 물어뜯기 전에 몇 번이고 주위를 맴돌았다.
"무슨 소리야?"
"너를 처음 봤을 때 했던 생각."
푹신한 소파. 왼손은 뱀처럼. 자유로운 오른팔과 두 다리는 거미처럼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특히 오른팔은 내 목을 괴롭지도, 그렇다고 자유롭지도 않게 조르고 있었다.
표준체중을 조금 웃도는 성인 남자가 절반쯤 몸을 포갠 채 누워있으면 불편하기도 하련만, 윤희는 잡아들인 먹잇감을 칭칭 동여매는 거미라도 된 양 불편한 자세를 고수했다.
그녀의 왼손이 자꾸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는 탓에 기분이 묘했지만, 애써 명치 언저리에 펼쳐놓은 책의 글귀에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은 어떤데?"
"지금도 거슬려."
이번엔 귓가에 뜨뜻한 입김이 닿았다. 습기를 머금은 살덩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기껏해야 입술을 오물거리는 정도의 움직임일 테지만, 내게는 다리를 다친 가젤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육식동물 소리처럼 들렸다.
"그렇게 벗기면 안경 망가져."
"사줄게. 새 거."
이제 그녀의 입술과 혀는 안경의 팁이 아니라 내 귓불을 노렸다. 찌릿한 전기가 흐르더니 등줄기를 전선 삼아 저 아래 어딘가로 흘러내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읽던 페이지에 가름끈을 끼우고 책을 덮었다.
"지금이랑 그 때랑, 어느 쪽이 더 거슬려?"
"지금."
"왜?"
"그 때는 그냥 보기만 해도 재수 없었거든. 근데 지금은 알면서도 모른 척 하니까 더 재수 없어. 일부러 그러는 거지?“
잔뜩 토라진 목소리였다. 그 바람에 쿡,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윤희가 책을 낚아채더니 러그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비싼 책인데...“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더 나은 거 몰라?“
”저건 이론서가 아니라 소설이거든?“
”하루키잖아? 나도 대강 알아.“
”와, 넌 책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읽어본 적은 없어. 하지만 중요한 장면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아주 잘 알지.“
윤희는 ‘잘’이라는 음절을 길게 늘어트리며 말했다. 분명 인터넷 어디선가 본 걸 테지.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루키 스타일’이라 불리는 문장의 핵심 단어를 듣고 싶어졌다.
”어떻게 끝나는데?“
”그러니까 지금부터 실습해보자는 거 아냐? ‘레포트로 대체할게요!’ 따위 소리 하면 물어뜯어버릴 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끅끅거렸다. 어느 새 뱀은 동굴에서 빠져나와 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뱀의 주둥이가 조심스레 안경을 벗겨냈다.
안경이 러그에 떨어지는 소리를 신호로, 우리의 하루키 실습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