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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9 22: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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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또기 /
국사 국정교과서의 위험성... "편협한 역사 강요 말라"
[주장] 역사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돼... 다양성 열어둬야
조선시대 유학의 주류는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주자학으로도 불렸다. 주자학은 남송 시대의 주희(朱熹, 1130~1200)가 집대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 곧 주자학은 단순한 유학 분파가 아니다. 왕조의 주요 통치 이념이자 양반 사대부 세력의 사상적 배경이었다. 그들 지배층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그런 것처럼, 조선시대의 주자학은 그들의 유일 사상이자 절대적인 교조였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신적 존재와도 같았다. 그에게는 감히 '주희'라는 이름도 쓸 수 없었다. 그는 유교의 성현에 대한 극존칭 표현인 '공자'나 '맹자'처럼 '주자'로 불렸다. 일부에서는 피휘(避諱) 관습도 생겨났다. 피휘는 군주나 조상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신하나 후손들이 그들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일개 유학자가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인 비이성적인 풍경이다.
이런 상황은 17세기 이후에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주자학 이외의 유학은 인정되지 않았다. 주자학은 이념 보위의 홍위병 구실을 하면서 다른 유교 이념이나 사상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사문난적이라는 말 자체가 '주자학을 문란하게 만든 도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주자학에서 벗어난 유학을 도적이라고 폄훼할 정도로 주자학의 순혈주의는 급속히 강화되어갔다.
주자학 이외의 것은 이단이었다. 배척해 없애야 하는 사술(邪術)이었다. 그래서 주자학을 벗어난 이단들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다. 윤휴(1617~1780)와 박세당(1629~1703)은 사문난적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주자학을 '종교'가 아니라 '학문'으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그 해석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송시열과 노론 일파에 의해 처형과 삭탈관직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우려했던 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눈앞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 국정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물꼬를 트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남수 교육부장관도 일찌감치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검토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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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24149&CMPT_CD=P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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