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고뇌 끝에 결정을 내린 탓일까. 3일 오후 기자회견을 위해 국회 당대표실로
들어서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회견장으로
들어가다 돌아서서 기자들에게 악수를 건네는 여유를 보였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환하게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회견문의 표현도 평상시와는 달랐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내야 합니다.” “국민들은 우리당의 상황에 진저리를
내고 있습니다.” “꺾일 때 꺾이더라도 해야할 일, 가야할 길을 가겠습니다.” 낯설다. 평소 쓰던 절제된 용어가 아니다. 참모
들이 썼나 했는데, 문재인 대표가 직접 썼다고 한다. 참모들이 손을 본 건 ‘진저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라고 한다. 애초 문
대표는 ‘진절머리’라고 했는데 이 단어가 속어여서 ‘진저리’로 바꿨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이 즐겨 쓰던 것들이다. 속돼 보이기도 하지만, 부산 자갈치시장의 펄펄뛰는 생선 같은 언어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의 글을 도맡았던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되도록 차분하고 담백한
용어를 선택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빨간 펜을 들고서 내가 쓴 초고를 격정적인 표현들로 바꾼다. 거꾸로 대통령의 표현
이 격하면 내가 가라앉히고는 했다. 서로 보완관계였던 셈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표의 글투는 나와 아주 비슷하다. 내가 문
대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없다.” ‘왜 문 대표 곁에서 도와주지 않느냐’는 주변의 권고에 답한 말이다. 그때와 비교하
면 문 대표의 수사법은 많은 변모를 겪었다.
문 대표의 감정상태는 2002년 후보 시절 노무현 것과 닮아보인다.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으나 끊임없는 흔들기에 울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3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안철수 전 대표가 제안한 ‘혁신 전당대회’에 대해
“사생결단, 분열의 전대가 될 수밖에 없다”며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email protected]12/4/2015 문재인에게 노무현 기질이 스며들고 있다 : 정치일반 : 정치 : 뉴스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PRINT/720426.html 2/3
컥하고는 했던 심정이다. 지난 9월 문 대표가 ‘재신임을 묻겠다’고 폭탄선언을 했을 무렵이다. 어느 지인이 문 대표를 만나
“안철수 의원을 잘 관리하라”고 조언했는데 돌아오는 말이 격했단다. “안철수가 아니라 제 마음을 잘 관리해주십시요. 나
도 내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습니다.” 4월 재보선 패배 이후 계속된 당내 비판에 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린 한 장면이다.
문 대표는 재신임 투표를 철회하고서도 당내 분란이 계속되자 “그때 강행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후회하는 말을 하고
는 했단다.
그래도 9월의 격렬함이 12월에는 책임감으로 바뀌었다는 게 한 측근의 얘기다. “이번에 문 대표를 아끼는 각계의 원로들
이 많은 충고를 했다. ‘정치를 그만두라’는 극단적인 말씀도 있었다. 이에 대한 문 대표의 답은 ‘언제라도 내려놓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책임있게 그만두겠습니다’였다.” 이 측근은 문 대표가 ‘단단해졌다’고 말했다.
문 대표가 기자회견 직후 유성엽, 황주홍, 신기남, 노영민 의원과 김창호 전 분당갑 지역위원장 등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취한 것도 과거 좌고우면하던 모습과는 다르다. 문 대표는 자신에게 ‘한칼’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달 전에 사퇴했던 안
병욱 윤리심판원장을 복귀시켰다. 이제는 ‘코란이냐 칼이냐’ 선택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내야 합니다”라며
노무현이 즐겨 쓰던 펄펄뛰는 말투 닮아가고
당무감사 거부 의원에 단호…승부사 기질 보여
내년 4월 총선 직전까지 더 요동칠 당내 상황
문재인의 승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문재인 대표의 처지는 노무현 후보 시절과 겹치는 대목이 많다. 노무현은 2002년 4월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
정됐으나 6월 지방선거에서 패배하자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두 달만이었다. 문재인도 2월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뽑혔으나 두 달 뒤인 4월 재보선에서 패배한 직후부터 사퇴 압력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002년 민주당이 당무회의에서
‘노무현 후보 재신임’을 만장일치로 의결한 뒤 표면상 안정을 되찾았듯이, 문재인 대표도 9월 재신임을 제안했다가 당 중
진들의 만류를 받아들여 재신임 투표를 철회하면서 한 고비를 넘기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내분은 13년의 시차를 두고 그저 ‘봉합’됐을 뿐이다. 곧 실밥이 터졌다. 노무현의 경우 그
해 월드컵 기적을 타고 정몽준 바람이 일고, 8월 재보선에서 다시 패하자 후보의 지위가 흔들렸다. 당시 한화갑 대표까지
나서 이른바 ‘백지신당’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백지신당은 말 그대로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신당으로서 새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3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안철수 전 대표가 제안한 혁신전당대회 수용 불가
방침을 밝힌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email protected]12/4/2015 문재인에게 노무현 기질이 스며들고 있다 : 정치일반 : 정치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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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민주당이 선출한 대통령후보도 자연히 소멸될 위기였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9월 “참을만큼 참았다”라고 선언하며
후보 선거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마이 웨이’를 외친 것이다. 그때 노무현은 “국민경선은 이제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통합이든 단일화든 패배주의이며 내게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제는 원칙대로 간다”고 선언했다. 지난 4일 문재인의
기자회견 분위기와 흡사하다. 노무현의 “참을만큼 참았다”가 문재인에 와서는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나 “우리당의 상황
에 진저리를 내고 있습니다”로 바뀌었을 뿐이다. 13년 전의 백지신당은 지금의 전당대회에 해당한다.
문재인은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노무현과 자신의 다른 점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변호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선은 여기까지다’라는, 스스로 설정한 행동의 한계가 있었다. 변호사는 변호사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
다. 노 변호사는 그렇지 않았다. 경계가 없었다.” 1980년대 격동기에 노무현 변호사가 ‘혼자서 구호를 외치며 큰길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리는 모습’을 보며 그런 차이를 절감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노무현의 기질이 조금씩 문재인에게 스
며들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과도 같을 수 있을까? 일단 겉보기에는 문재인의 상황이 노무현의 조건과 비교해 불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노
무현에게는 정몽준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지만, 문재인 경쟁 자들의 위력은 미지수다. 게다가 문재인에게는 박원순
서울시장이라는 우군이 있다. 의원들의 세력분포를 봐도 나쁘지 않다. 2002년 당시에는 노무현을 비판하는 의원들이 대
통령후보 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로 뭉쳤는데, 그때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후단협 출범식에는 35명의 현역의원이
참석했다. 민주당이 사실상 둘로 쪼개진 것이다. 2015년 당내 사정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
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훨씬 불리한 게 사실이다. 호남에서의 저조한 지지율, 친노-비노 프레임이 작동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국민들의 ‘열기’다. 노무현은 1988년 청문회 때 보여준 스타 기질과,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
해 떨어져도 떨어져도 부산에서 몸을 던지던 헌신성으로 야권 지지층에게 큰 부채의식을 지웠다. 사람들의 가슴에 차곡차
곡 저금을 해 둔 것이다. 그러다가 어려울 때 한꺼번에 찾아쓸 수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은 그만한 저축액이 없다. 지난 대
선 때 48%의 지지를 받기는 했지만 어느새 은행 잔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다. 그로서는 앞으로 넉달 동안 부지런히 벌어
저금을 하면서 동시에 필요할 때 인출해 써야 하는 상황이다. 야권의 상황은 지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내년 4월 총
선 직전까지 몇번이고 더 요동을 칠 것이고 문재인은 번번히 시험대에 서야 한다. 노무현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고차방정식
을 풀어야 하고, 훨씬 더 크게 던져야 하는 상황을 맞을 것이다. 문재인의 승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김의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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