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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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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위로 형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세조비인 정희왕후와 한명희를 비롯한 세조정란의 공신들간의 정치적 타협으로 왕좌에 올랐기때문에,
집권초기-중기까지는 만사에 조심하는 모범군주였습니다만, 후기에 들어서는 대사헌의 간언도 무시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어렸을때 석강(저녁 공부)까지 할 정도로 공부 모범생이었지만, 아들인 연산의 교육에 있어서는 그리 열심이지 않았구요.
말인즉슨 성종의 모범적인 모습의 이면에는 정치적 타협으로 오른 왕좌에 오른것에 대한 불안감과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모범적인 군주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매우 컸다는 거죠.
연산은 어린시절 성종의 그런 모습 ( 간관들의 과도한 간언에도 꼼짝못하고 들어주는 )을 보면서 권력을 구성하는 삼대요소인
왕권, 신권, 여론(당시에는 삼사의 발언)가운데 여론의 힘이 과도하게 성장했다고 판단했고, 권력의 균형을 위해 여론의 몫이 줄어들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성종기에 과도하게 확장된 삼사의 힘을 볼때 이는 그다지 비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집권초기에는 신권과 여론사이에 상당히 신중한 정책을 통해 균형을 만들어냈고, 외치에 있어서도 매우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패착이라 할수 있는것은 옥사를 통해 달성한 강력한 왕권의 지향하는바가 없었다는 겁니다.
즉 무엇을 위한 강력한 왕권 ( 강력한 국가, 정의로운 사회, 평등한 공동체등 )이 없었어요.
결국 목적없는 강력한 왕권이 모든 견제를 파괴하고 이른곳은 방종과 패악이었을 뿐이죠.
동서고금을 통해 항상 지켜졌던 것이죠. 견제없는 권력은 부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