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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5 21: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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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고구려의 존립이 보장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류왕 7년기 상황을 보면 이미 고구려 정벌론이 대두된 상황이었고, 이미 연개소문 집권이전에 당은 고구려를 염탐했었고, 고구려도 당에 대항한 축성작업을 계속하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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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고구려에 대한 臣屬 또는 정벌론이 대두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당 고조 7년(고구려 영류왕 7년 ; 624)에 고조는, 고구려가 수에 稱臣했지만 끝내 수양제를 거역하였으므로 굳이 칭신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수의 遺臣으로 당시 侍中이었던 裵矩와 中書侍郞 溫彦博이 반론을 폈다. 周代에는 箕子國에 봉해졌었고 漢代에는 玄菟郡이었으며 魏晋 이전까지는 封域에서 가까이 있었으니 고구려가 칭신하지 않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항변함으로써 고조도 이를 수긍했던 것이다.
결국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패권주의의 지향에 있어서는 당도 수와 다를 바 없었으며 이런 주장은 唐帝를 둘러싼 측근세력일수록 강했다고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가 칭신하여 藩禮를 행하지 않으면 四夷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정벌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런 가운데 고구려는 영류왕 23년(640)에 世子 桓權을 入唐시켰다.
이는 당의 평화공세가 영향을 미친 증거인지 모르나 고구려는 평화공존의 뜻을 당에게 충분히 보여준 것이며 외교적 성의를 다했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은 職方郞中 陳大德을 파견했는데, 그는 고구려의 地勢와 방어체제를 샅샅이 살피고 돌아갔다. 그가 고구려 경내를 순방할 때 가는 곳마다 고구려 관리들을 물화로 매수하여 어디든지 마음대로 볼 수 있어 虛實을 살폈지만 고구려는 이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고구려 지도에 따른 실사를 마친 셈일 것이다. 더욱이 그가 돌아가 당 태종에게 보고하자, 태종은 수륙양면 작전에 의하여 고구려 정벌의 뜻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이 당의 평화를 가장한 문화적 기미정책 속에, 고구려도 對唐敵對意識이 높아져 그 대비책이 강구되었을 것이다.
이미 영양왕 말기부터 축조하기 시작했던 千里長城이 16년 만인 영류왕 14년(631)에 완성되어 동북의 扶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렀다.
이 장성은 수와의 전쟁을 마치고 착공된 점과 그 축조의 위치로 보아 당의 침입을 방어하여 국가를 수호할 목적이었음이 확실하다.
또한 수와의 전쟁 중 훼손되었던 요동지방의 성벽을 재축조하고 병력과 민호를 충원하여 수비를 강화했을 것은 능히 추측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