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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2 20: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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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아닙니다. 전문을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50P, "亂"이란 표현은 그저 어지러운 상황을 나타낼 뿐입니다. 멸칭도 존칭도 아닙니다.
①『국사 교본』- 진단학회
삼별초가 대 몽고전의 중심이었음을 밝히고 삼별초의 항전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특히 삼별초의 항전을 강대한 세력(몽고)와 끝까지 싸운 고려무사의 전통적 정신을 발휘한 것이라 고 평가하여 삼별초의 항전을 높이 서술하고 있다.
前부터 抗夢戰線의 中心이 되어온 三別抄는 裵仲孫의 指揮밑에서 動亂을 일으켜 松京政府와 因緣을 끊고 새로히 政府를 만들어 끝까지 蒙古와 싸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承化侯를(이름은 溫이니 王族임) 王으로 세우고 珍島로 내려가 그곳을 根據로 얼마동안 抗戰을 계속하다가 松京과 蒙古의 聯合軍에게 敗하였다. 그들은 다시 濟州로 들어가 抵抗하더니 마침내 衆寡가 不適으로 敗亡되고 말았다. 이 三別抄의 亂은 前後 四年에 걸쳐 끝까지 結束을 굳게하여 强大한 勢力과 싸운것이니 이는 高麗武士의 傳統的 精神을 十分 發揮한것이다.
②『새 국사 교본』- 이병도
『새 국사 교본』에서는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하여 개경환도에 반대의견을 가진 무리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국사교본에서의 민족적 색채가 보이지 않는다.
元宗 11년에 이르러 드디어 舊都 개경으로 환도를 결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강도안에서는 몽고에 대하여 어디까지 抵抗하려는 一派가 있어 개경환도에 反意를 품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난을 일으켰으니 이른바 三別抄의 亂이 이것이다. 3別抄(左 右별초와 신의 별초)란 것은 원래 최씨 집권시대에 양성하여 오던 특별군대이었는데 이때 그들을 통솔하고 있던 裵仲孫이 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은 일시 기세가 대단하였으나 官軍의 토벌로 말미암아 강도에서 서남해쪽으로 옮기어 마침내 제주도로 들어가 수년간 버티다가 官夢軍에게 敗滅을 당하고 말았다
79P, 국사교본과 새국사교본, 두 교과서가 "다른 교과서들에 비해" 삼별초의 항전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이고, 정확히 말하면 다른 교과서에는 삼별초난에 대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몽고의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된 것뿐만 아니라 몽고에 대한 고려의 항쟁을 주로 서술하여 민족 주체적 입장을 잃지 않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삼별초의 대몽 항쟁에 대해서도『국사교본』과 『새국사교본』의 경우 자세히 소개하면서 삼별초의 항전을 높게 평가하고 있으나 다른 교과서들의 경우 내용이 빠져 있거나 특별히 서술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