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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16: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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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홍건적과 왜구, 원나라군벌(나하추)의 군사력이 그리 작지도 약하지도 않았습니다.
1. 홍건적, 1차 침공때 4만, 2차 침공때 10만, 2차침공때 동원된 고려군이 20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196310&position=1
그러나 반원정책의 천명과 더불어 힘차게 출발한 중흥정책은 동왕 8년 12월과 10년 10월 紅頭賊의 두 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인해 송두리채 무너지고 말았다. 제1차의 침구는 平章 毛居敬이 4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서경을 함락시키는 등 한때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안우·이방실 등이 咸從에서 싸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적병 2만 급을 참하고 僞元帥 沈刺·黃志善을 포로로 잡게 되자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고 말았다.
이렇듯 1차 침공 때에는 적이 서북면을 넘지 못하고 우리 장수들의 전공으로 다행히 물리칠 수 있었으나, 2차 침공 때에는 僞平章 潘城·沙劉·關先生·朱元帥 등이 10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그리하여 이 해 11월 하순 결국 개경이 함락되고 말았다. 공민왕은 할 수 없이 福州(安東)로 피난하였으나 홍건족이 개경에 머물고 있던 50여 일간의 잔학행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하였다.
개경에서 뿐 아니라 그들이 지나온 개경 이북의 성읍과 전야의 피해도 대단히 심각하였는데, 이에 고려에서는 군대를 다시 정비하여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안우·이방실·최영 등의 여러 장수로 하여금 20만 군을 인솔하게 하여 다음해 정월 4면으로 개경에 진격하여 적을 대파하고 관선생·사유 등을 잡아 죽였다. 그러자 적세는 크게 꺾여 破頭潘은 나머지 무리를 거느리고 허겁지겁 압록강을 넘어 달아나 버렸다
2. 왜구, 공민왕/우왕기에 200~400여척규모의 침입만 5차례 ( 병력으로 치면 6천~1만 2천규모 ). 단순한 도적때로 간주하기는 어려움.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20_0030_0040_0020_0010
침입한 왜구의 인원수에 대하여 살펴보면 공민왕 13년(1387) 5월에 왜적 3,000을 진해현에서 대파한 기록이 보이며 우왕 5년(1379) 5월에는 騎 700·步 2,000의 침구가 있었고, 도적이 많으면 千百으로 떼를 짓고, 적으면 什伍로 隊를 지어 다닌다고 하였다.
이러한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왜구는 단순한 해적의 오합지졸이 아니고 배후에는 유력한 土豪가 있어 직접 조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표적인 조종자는 대마도주 宗氏와 壹岐島主 志佐氏·西部日本의 巨酋 周防의 大內氏·九州豊後 大友氏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시기 왜구는 숫자로만 판단할수 없습니다. 명나라가 입을 피해를 보면 알수 있죠.
그래서 진법까지 새로개발했지. 단지 "도적때"를 잡기위해서 말입니다.
http://www.sciencetimes.co.kr/?news=039%EB%AA%A8%EC%84%B8%EC%9D%98-%EA%B8%B0%EC%A0%81039-%EC%9D%B4%EC%9A%A9%ED%95%9C-%EC%B2%99%EA%B3%84%EA%B4%91%EC%9D%98-%EC%99%9C%EA%B5%AC-%ED%86%A0%EB%B2%8C
1553년 8월 왜구들이 절강성의 상우현에 상륙해 벌인 참극은 처참했다.
이들은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고, 항주에서 절강 서쪽을 지나 안휘성 남쪽을 짓밟은 다음 남경에 육박했다.
그 후 또다시 표양·무석·소주 등지에 상륙해 절강·안휘·강소의 3성을 짓밟으면서 80여 일에 걸쳐 4천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3. 나하추, 명군의 요동진입을 막을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했고, 명은 진압을 위해 20만을 보냈습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197109&position=6
명은 나하추를 공략하기 전에 먼저 압록강·佟佳江·輝發河 상류 일대를 경략하여 고려와의 연결을 차단시키는 한편, 원의 잔여세력과 여진 각 부를 초무하여 나하추를 고립시키는 일에 주력하였다. 우왕 13년(1387) 명 태조는 나하추를 일거에 섬멸시킬 목적으로 풍승으로 하여금 20만 대군을 이끌고 金山으로 육박시켰고,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안 나하추는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다.
나하추의 세력이 강성하였을 때는 북으로 북원과 연결하고 남으로는 고려와도 교통하여 명군이 요동으로 진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명군이 북원의 주력을 토벌하는 데도 측면의 위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