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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5 15: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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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1111 치아미백 : 상인이라는 것도 단순히 일본의 주장이었죠. 상인일 경우와 일본군 장교일 경우 일본의 군경중 사건처리 담당이 다른데,
사건을 담당하고 김구를 구속한 담당기관은 일본군이라고 하는데, 상인이라면 당연히 일본경찰이 담당했어야 하지 않나요?
그리고 일본군 장교중에 스치다가 없었다는 것또한 일본 만의 주장일 뿐이죠. 아니면 김구 선생이 이름을 착각했을 수도 있구요. 스치다, 마츠다 등등
비슷한 이름이었을 수도 있구요.
이는 제 생각에 당시 김창수(김구 선생)의 죄질을 '선량하고 무고한 일본 평민을 살해한 조선청년의 죄를 더 가중케하려고 한' 음모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가 상인이었나 아니면 일본 장교였나 하는 것은 객관적인 평가에서 상당히 반응이 엇갈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정말 일본군 장교였을 거라고 하는 심증이 있네요.(근데 솔직히 제 기억이 오래되어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으므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지식백과 사전의 내용
독립운동가·정치가. 초명은 창수(昌洙), 호는 백범, 본관은 안동. 황해도 해주 사람. 15살 때 한학을 배우고 17살인 1893년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어 동학혁명에 참가했다. 95년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土田壞亮)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했다. 10년 신민회에 참가했고, 11년 <105인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14년 출옥했다.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의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고, 28년 한국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으며,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했다.
40년 임시정부가 중경(重慶)으로 옮겨간 다음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44년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특수부대를 훈련시켜 본토진입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의 항복을 맞았다. 귀국 후 한국독립당을 이끌며 통일자주독립 노선을 지향, 이승만의 단독 정부수립 노선과 대립했다. 48년 남한만의 단독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에 갔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49년 6월 26일 거처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저서에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구 [金九]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9.10,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