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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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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과장이 많지요.
예를 들어 서한 원제의 후궁으로 있다 흉노의 선우에게 하사된 왕소군의 경우,
후궁이 너무 많아 황제가 일일이 보고 고를수가 없으므로 화공이 그린 화첩을 보고 골랐기 때문에 후궁들이 화공에게 뇌물을 줘서 이쁘게 그리곤 했는데 왕소군은 워낙 미모에 자신이 있어서 뇌물을 주지 않은 까닭에 못생기게 그린 바람에 황제가 골라 줫는데 실물은 중국의 사대미인에 들어갈 정도의 역대급 미모여서 나중에 화공을 죽였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 원제는 역대급 검소한 황제 였죠. 중국에 유교가 국가지도원리가 된것은 무제 유철이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자감을 설치하면서 이지만 실상은 여전히 도교에 심취하여 유학은 아랑곳 하지 않았죠. 그것은 사마천의 사기중 금상본기와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이 무제를 진시황과 비교해서 평한걸 보면 알수있습니다.
그런 서한을 실제로 유교화 한 황제가 원제 유석 입니다. 말로만 유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유가적인 삶을 살고자 궁을 축소하고 후궁들과 궁녀들의 숫자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생활도 검소하게 하였습니다.
원제의 아버지인 선제 유순은, 황태자였던 할어버지 유거가 역적으로 몰려 토벌당해 죽어서, 어머니 사씨가 임신중이였기 때문에 액정궁에서(여죄인이나 병자들을 감금하던궁) 태어나 하급관리인 허광한 에게 내려져 시장골목에서 성장한 사람으로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박힌 편이지만 원제는 그보다 더해서 아버지로 부터 좋지 않은소리를 들을 정도 였지요. 그런 황제가 화공이 그린 화첩을 보고 침소를 정했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낭설로서, 황제의 성생활은 케바케 입니다
수나라 문제 양견은 북주 팔주국 가문 출신으로 같은 팔주국 가문인 독고씨에게 장가를 갔는데 황후의 강짜가 심해 후궁을 둘수가 없었으며, 이에 반발해서 황제의 신분으로 가출을 한적이 있었고,
반면 서진의 무제 사마염은 후궁의 수가 너무 많아 스스로 침소를 정하지 못하고 양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양이 멈추는 거처를 침소로 정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원인은 아니지만 판단력 만큼은 흐려져 바보 아들을 황태자에서 내치지 못하고 며느리인 가씨가 황후가 된후에 나라를 망쳤지요.
명조의 신종 만력제 주익균은 총애하던 정귀비 소생인 복왕 주상순을 황태자로 세우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장자인 이귀비 출생 주상락을 황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황제의 신분으로 파업을 하고 정귀비 궁에 칩거하여 십수년동안 정사를 외면한 경우도 있지요.
모든것이 황제의 뜻이지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