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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1 13: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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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열보병은 왜 이렇게 싸웠는가? ¶
생각해보면 전열보병들의 전투 방식은 코앞에 적을 두고 일렬로 마주서서 총을 쏘는, 어찌보면 매우 신사적이고 어찌보면 몹시 우스꽝스러운 방식의 전투이다. 실제로 퐁트누아 전투에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서로 먼저 쏘라고 선빵을 양보하는 웃지 못할 광경까지 연출되었다.[2] 오늘날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열 맞춰서 마주 서서 쏠 것 없이 흩어져서 엎드려 쏘면 우습게 이길 것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런 전투 형식이 고집되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3.1 근본적인 원인: 머스킷 ¶
흔한 편견과 달리 머스킷은 그렇게 정확도가 떨어지는 무기는 아니다. 머스킷이 너무 안 맞아서 엄폐가 필요없다거나 목표물에 대고 쏴야 맞는다는 말은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 혹은 훈련 강도가 대체로 낮았던 당시 병사들의 투정-_-에 불과하다. 만약 머스킷이 그 정도로 명중률이 나쁜 무기였다면 애당초 대량으로 보급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머스킷은 전쟁 무기인 동시에 민간인들에게도 사냥을 위한 생활도구로 쓰였다. 물론 강선이 있고 유선형 탄환을 사용하는 후대의 소총과 비교하면 민망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숙련된 사수의 손에 들어가면 약 70~80미터 정도의 목표물과 어느 정도 교전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숙련된 사수'를 구하거나 키우는 것은 몹시 어렵고, 게다가 흑색화약의 매연은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병사들이 두 세번만 사격을 주고받아도 시계가 거의 0에 가까워, 조준사격을 하고 싶어도 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때문에 확실성을 위해 점 단위 사격이 아닌 면 단위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고자 한 것이다. [3]
게다가 명중률과는 달리 훈련이나 기타 노력으로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머스킷의 장전 속도였다. 아무리 빨리 장전하더라도 머스킷의 발사 속도는 1분에 3~4발[4]이 한계였다. 명중률 문제도 있었지만, 이렇게 공격 속도가 느린 보병을 산개해서 배치하면 적의 기병이나 수백명씩 떼지어 착검돌격하는 적 보병에게 각개격파되어 전멸당하게 된다.
전열보병과 동시대에도 산개대형으로 은엄폐한 채 조준사격을 하는 경보병은 존재했지만, 이들 역시 엄폐물이나 아군의 엄호 없이는 적병의 먹이감일 뿐이었다. 때문에 산개한 경보병 부대들은 정찰과 교란 용도로나 쓰이며, 회전 이전에 선두에 서서 본대인 전열보병의 움직임을 가리거나 보조하는 정도였다. 이들조차 필요할 때는 산개하는 대신 밀집전열을 짜고 교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강선과 미니에 탄 등을 적용해 명중률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신형 라이플이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전열은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소총의 명중률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전장식 소총의 화력 한계가 더 본질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존 지휘관이나 군 규율의 경직성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에 어울리는 새로운 전술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점도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퐁트누아 전투의 사례에서 서로 선빵을 양보한 것은 단지 겉멋든 신사들의 허영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 쏜 뒤에 장전하느라 한 자리에서 멈춰 서 있으면 그만큼 이쪽은 더 전진해서 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당연히 전열에서 뿜어내는 탄환의 밀집도도 올라가기 때문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항목 맨 위에 걸려 있는 패트리어트의 전투신에서도, 먼저 사격한 대륙군은 영국군에게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한 반면, 영국군이 피해를 감수하고 대륙군이 장전하는 동안 더 다가가서 사격하자 한번의 일제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전열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3.2 부수적인 원인- 병사들의 낮은 사기? ¶
과거 18세기 초 유럽 국가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강제 징집된 하층민이었다. 사기가 낮은 이들을 지형을 이용해 엄폐하도록 산개시켜둔다면 전투가 벌어지는 도중에 혹은 그 전에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부대가 와해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렇다면 현대의 군대라도 한국군 같은 징병제 군대를 각개전투를 시키면 부대가 와해되냐?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고, 이 질문에 대해 완전히 No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근대 민주주의 사상이 퍼진지 얼마 안 되어서 '피지배 계급'이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의식을(즉 '피지배 계급' 자신도 국가의 정당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던 이 시기와,[5] 민주화가 상당부분 진행되어 일부 극렬분자 이외에는 모두가 자기가 사는 나라를 "자신의 나라"라고 여기는 현대국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당대 유럽의 군대와 달리 영국군은 나폴레옹 이전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100% 모병제였으나 역시 전열을 유지했고, 혁명 이후 프랑스 민족주의의 고취와 고참병들로 이루어져 사기가 충천했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6]도 어김없이 전열을 이루어 싸웠다. 그리고 거의 완벽히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병사들이 상당수 자의로 참전한 남북전쟁이나 보불전쟁에서도 여전히 전열이 유지된 것을 보면 단순히 "사기 엉망인 오합지졸들 탓에 전열을 유지하면서 싸워야 했다"라는 명제는 전혀 맞지 않다.
애당초 애국심의 문제 이전에, 총기와 대포의 무시무시한 굉음이 주는 정신적 충격을 평범한 생활을 보내던 사람들이 버텨내기 어렵다. 일종의 쉘 쇼크로 인간에게는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담력만으로 어떻게 극복하기 어려운 생리적 작용이다. 혹은 창칼을 든 적 기병 수천 명이 몰려와 동료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죽이는 상황에서 대체 애국심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결국 '병사들의 낮은 사기'가 전열 대형이 자리잡게 된 원인의 일부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모든 병사들에게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매우 부차적인 원인일 뿐이며, 본질적인 원인은 어디까지나 머스킷 성능의 한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출처 - 엔하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