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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1 01: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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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팔 티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통나무 같은 오른팔. 팔꿈치 위 10 센티미터 정도 위에 계란만한 멍이 들었다. 형석은 몇 번이고 팔을 돌려 멍 자국을 확인하려 하지만 온몸이 우락부락한 탓에 그 마저도 쉽지 않다. 티셔츠 소매를 찢어버릴 기세로 부풀어 오른 알통 탓에 손끝이 어깨에 닿도록 구부리는 동작도 간신히 해낼 정도였다.
“그러게, 일을 하러 나올라며는 잠을 다 깨고 나와야 헐 것 아녀. 누구를 닮아가지고 기냥. 어휴.”
형석의 어머니는 대파 몇 단을 가지고 진열대 안으로 들어서며 핀잔을 주었다.
“시방 그게 누구 들으라고 하는겨? 설마 허니 나한테 허는 말은 아니겄지?”
“몰러유. 나는 그냥 씨부린 건디 뚫린 귓구녕이라고 거기로 쏙 흘러 들어갔나비네. 뭔 놈의 수챗구녕도 아니고 참말로.”
형석의 아버지가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들여다보다 아내의 핀잔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되받아칠 말이 마땅치 않았는지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시 신문을 들여다 보았다.
어머니의 지적대로 형석은 아침잠이 많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형석을 곰탱이잠탱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의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새벽에 가장 먼저 뜨는 어머니에 비하면 늦잠꾸러기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형석의 팔에 생긴 멍은 아침나절에 포장된 냉장육 상자를 나르다 생긴 것이다. 미끄러운 바닥을 잘못 디딘 그는 어깨로 냉장실 안에 있는 선반을 들이받고 말았다. 소싸움에 등장하는 소만큼이나 육중한 그가 들이받았으니 선반이 무사했을 리 없다. 형석은 작은 멍 자국을 얻었지만 상대는 몸통의 절반이 넘는 부위에 복합골절을 얻었다.
“이제 저녁 시간 다 되어가니께 파절이는 두 단만 혀. 주말 아니믄 누가 삼겹살 사가기나 혀?”
“허이구, 내가 당신인 줄 알어유? 파절이는 내가 알어서 허니께 당신은 고기나 신경 써유.”
“오늘 뭐 잘못 먹은겨? 즘심으로다가 같은 칼국수 먹어놓고 왜 혼자 쉰소리를 하고 그려?”
“아이구 내가 또 혼잣말을 한다는 게 깜빡혔네. 입 열믄 배꺼징게 보던 신문이나 봐유.”
아버지가 어머니를 쏘아보았다. 형석은 두 사람의 싸움이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달리 말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진 아버지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불만을 쏟아내는 것에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진열대 앞에 인기척이 불거지자마자 그런 분위기는 물청소를 한 듯 싹 사라졌다. 형석은 멍 자국을 들여다보는 척 하다가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뭣 좀 드릴까...”
형석은 입을 벌린 채 마지막 음절을 내뱉지 못했다. 진열대 너머에 선 훤칠한 미인은 그런 형석의 모습을 보고 활짝 웃었다.
“연희야, 인사해. 형석이 삼촌 알지?”
“안녕하세요오~”
형석은 동상처럼 얼어붙은 상태로 눈알만 굴려 진열대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이마가 훤히 드러나도록 머리를 잡아당겨 묶은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 연희는 배꼽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다가 흰자위가 반이 넘는 형석의 눈을 보았다. 순간 연희의 표정이 굳었지만 울음을 터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형석은 억지로 광대를 끌어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어... 어... 안녕...”
“어이구, 연희 왔냐~ 장조림은 맛있게 먹었구?”
“네에~”
“그거 고기 할아버지가 준겨. 맛이 워뗬어?”
“응? 엄마~ 워뗬어가 뭐야?”
소혜는 키득거리며 연희에게 ‘워뗬어?’라는 방언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엄마의 설명을 들은 연희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맛있었어요~”
“얼맨큼?”
“이 만큼!”
연희가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형석은 앞니 두 개가 빠진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 했지만 고개를 돌리며 가까스로 참았다.
“그람 오늘 더 맛있는 걸루다가 줘야 허겄네? 그려, 오늘은 뭣 좀 줄까?”
“등심 두 근인데, 돈까스 할 거예요.”
“그려 쪼금만 지둘려 봐~?”
형석의 아버지는 사람 좋은 웃음을 남기고 냉장육 창고로 들어갔다. 진열대에 있는 고기 역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래 있으면 수분이 날아가 밀봉한 것에 비해서는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진열대와 정육점을 구경하던 연희가 모녀를 바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형석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삼촌, 삼촌도 UFC 선수예요?”
“응...?”
“어머, 얘가 진짜... 형석 씨, 신경 쓰지 마.”
형석은 그게 이종격투기 대회를 지칭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여덟 살밖에 안 된 연희가 그 살벌한 대회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지... 알아?”
“네! 삼촌 같이 생긴 사람들이 나와서~ 막 싸워요~ 피도 나고 멍도 들어요!”
연희는 엄마를 닮아 예쁘장한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리며 선수들을 흉내 냈다. 아이가 주먹을 앞뒤로 번갈아 움직이자 소혜는 황급히 아이의 손을 붙들었다.
형석은 소혜가 당황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모습은 형석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껏 조용히 커피가 든 잔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나 살갑게 웃는 모습만 봐왔던 그에게 그녀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억지웃음을 짓는 것은 신선한 광경이었다.
“이놈아, 침 떨어지겄어. 연희 왔냐~? 쌈박질 하는 거는 어디서 그렇게 자세히 봤어?”
“네! 안녕하세요~!”
두 번째 배꼽인사에도 어머니의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세상만사에 흥미가 없는 듯한 시큰둥한 얼굴. 그래도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살가움이 묻어나는 것이 형석의 어머니였다.
“집에 혼자 있으면 자꾸 그걸 봐서요. 보지 말래도 소용도 없고, 그렇다고 티브이를 안 나오게 만들 수도 없고...”
“애들이 어디 어미 맘대로 크는감? 그건 그렇고, 오늘 삼겹살은 안 혀?”
“집에 들어가면 시간이 늦어서 해먹기가 좀 그래요. 냄새도 나고요.”
“그 놈의 아파트는 니 집인지 내 집인지 당최 분간이 안 간다니께. 글므는 뭐 궈 먹든지 볶아 먹든지 알아서 하고, 갈 때 이거 가져가.”
어머니는 진열대 안에 딱 한 덩이 남은 삼겹살 덩이를 꺼내 저울 옆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돈까스 거리만 사러 왔는데...”
“팔릴 때까지 둬봐야 묵기만 혀. 돈 안 받을 테니께, 걱정 허덜 말고 가져가.”
형석의 어머니는 조막만한 파절이 봉투까지 던져놓고는 소혜의 대답도 듣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머니와 교대하듯, 아버지가 다짐기에 넣어 편편하게 만든 등심을 들고 나왔다. 1415그램. 이번에는 값을 깎아주는 일은 없었다. 능숙한 솜씨로 등심을 포장한 뒤 삼겹살, 파절이와 함께 봉투에 담은 형석의 아버지가 연희를 보며 빙긋 웃었다.
“자, 엄마 힘드니께, 이건 연희가 들어야 허는겨?”
“삼겹살 값도 드릴게요. 얼마예요?”
“어허. 넣어둬, 넣어둬. 그거 혀봐야 얼매나 헌다구 그걸 야박허게. 우리 안사람이 준다고 했음 줘야 허는겨. 남자들한티 뭔 힘이 있간디~”
“아이 참, 그래두요.”
“어허 거. 연희 안 왔으면 짤 읎어~ 연희 엄마가 이뻐서 주는 것이 아니여~ 연희야, 오늘 엄마 따라와서 고기 벌어가네? 돈까스도 먹고 삼겹살도 먹어? 그래야 엄마처럼 키가 크는겨~”
형석의 아버지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소혜의 시선을 피하며 연희에게 웃음지었다. 그가 짤막한 인사를 남긴 뒤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계산은 형석의 몫이었다.
“만 육천 원만 주세요.”
“하아... 삼겹살 어쩌지? 내가 형석 씨한테 커피 열 잔 쏴야겠는데?”
“그, 그냥 드세요. 저는 부모님 못 이겨요.”
형석은 그렇게 내뱉어 놓고 어리숙한 대답을 한 자신을 질책했다. 약간은 핀트가 어긋난 대답에, 소혜는 빙긋 웃었다. 형석도 그녀의 미소에 화답하듯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고깃값 계산이 끝나고 소혜가 자신의 가게로 향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엄마와 형석의 대화를 지켜보던 연희는 인사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기인 배꼽인사로 마무리지었다.
“안녕히 계세요~”
형석은 대답하는 대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진열대 밖으로 몸을 내밀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모녀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간겨?”
“예. 갔어요.”
“참... 대단혀.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 혼자서 애를 키울 생각을 다 헌댜.”
“닥치면 다 허게 돼있슈. 나 봐유, 당신 같은 사람허고도 이렇게 살잖유.”
“하여튼 간에 한 마디를 안 져, 그냥. 에잉, 쯧”
두 사람은 서로에게 투덜댔지만 삼겹살 한 뭉치를 덤으로 얹어준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석은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돌리고 소리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