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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1 19: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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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안의 협력자들
앞서의 센다의 책에는 어느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한다. 1970년대 초반, ‘충
청북도 출신의 쉰네 살’인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안 갔지만, 1940년 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농촌이었던 우리 고향
에 키가 작은 일본인 남자가 와서 “돈 되는 일이 있다. 일은 편하고 식사도 제공
된다”면서 여러 집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는 마을마다 일본인 경찰의 주재소
가 있었는데, 그런 경찰이나 면장(원문에는 괄호 안에 ‘촌장村長’이라고 쓰여 있다-
인용자)을 대동하고 다녔으니 별 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생활이 여의치
않은 농가에서 몇 사람 응모했습니다. 응모는 미혼인 젊은 여성만 할 수 있었습
니다. 일본 내지의 방적공장이나 군의 피복공장 등에 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에, 사람들은 그런 일로 생각하고 응모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101쪽)
‘키 작은 일본인 남자’가 중간업자나 포주였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런데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이 다름 아닌 ‘면장(촌장)’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협조한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마을의 어느 집에 대상이 될 만
한 ‘가난한 처녀’가 있는지를 알고 부모나 본인을 설득할 수 있는 이들은 순
사나 중간업자가 아닌 마을 내부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센다는 인터
뷰한 위안부의 말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녀에 의하면, 1937년 말부터 1939, 40년 이전까지는 경찰이나 촌장을 대동하
고 오기는 했어도 강제는 아니었고, 동반한 것은 속이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
다. 쇼와 시대 초기에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도쿄의 업자들이 농민을 속여 처녀들
을 데리고 갔던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따라서 농촌에 주재하는 순사들은 주역이
아니고, 군의 어용매춘업자들의 압력기관으로서 칼소리를 내며 따라갔을 뿐이
었던 것 같다.(102쪽)
센다의 설명은 모집을 둘러싼 순사-경찰과 마을의 장-행정기관의 관
계를 가장 사실에 가깝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금의 ‘위안부’ 증
언집에도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알려주었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적
지 않다. 한 위안부는 “지금 생각하니 나보고 배급을 타가라던 이장 아들이
계집애가 있는 집을 다 가르쳐준 것이 아닌가 싶다”(『강제 2』, 47쪽)고 말한다.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38년에 우리 동네에 어떤 사람이 와서 광목공장에
취직할 사람을 모집하고 다녔다. 그 사람은 동네 구장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하
룻밤을 자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의 묵인 아
래 동네일을 보는 구장을 따라 광목공장에 취직하러 나서게 되었다. 우리 집은
술장사, 밥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동네 사람, 지서 주임, 면장, 구장, 반장까지도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서 주임이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한 것
같고 동네의 구장, 반장이 나서서 나를 끌어냈다.(『강제 2』, 169쪽)
센다는 일본군이 “조선총독부에 모집을 의뢰했고 총독부가 각 도•군•면에
내려보내 최종적으로는 면장의 책임으로 모았다”(103쪽)는 전쟁 당시 군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면장의 아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도 쓴다.
그는, “1941년경 5월이나 6월” 주재소 순사가 다녀간 직후에 머리를 싸
매고 고민하다가 결국 “‘일본 내지에 좋은 일자리가 있소. 어떻소, 딸을 보
내지 않겠소? 딸한테 송금을 받을 수도 있을 거요!’라고 권유하면서 돌아다
제1부 ‘위안부’란 누구인가–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1
닌”(104쪽)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데, 면장이 돌아다닌 집은 “가난한 집, 그
리고 아이가 많아서 생활이 어려운 집”이었다. 그리고 그가 권유한 처녀는
“우리 고향에서는 네 명이나 다섯 명”이었고, “모인 건 두 명”이었다. 그랬
기 때문에 이들이 떠날 때의 모습은 “울면서 보내는 광경은 분명 있었지만,
취직하러 고향을 떠나는 사람을 배웅할 때의 모습이었고, 심각한 건 아니었
던 것으로 기억합니다”(105쪽)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모집 대상은 위안부가 아니라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정신대였
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동네 사람들이 그런 모집에 가담한 것만은 분명
하다. 물론 이들은 당시의 ‘국가’의 여성 동원에 협조했을 뿐이고, 그런 한
그들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신대건 위안부건, 그들
이 그렇게 동원되는 과정에 조선인이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묵과한 것이
‘위안부 문제’ 를 혼란에 빠뜨린 원인이기도 했다.
참혹하고 슬픈 시대였습니다. 아버지는 약했다면 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
만 당시의 조선 사람이 달리 뭘 할 수 있었을까요? 해방 후에는 고향을 떠날 수밖
에 없게 되었지만, 저는 아버지는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면장
을 맡게 된 게 불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106쪽)
“면장을 맡게 된 게 불운”이라기보다는 한국이 병합된 것이 불운이었다.
20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면장’이건 ‘읍
장’이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제에 대한 영합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그 지위를 얻었다 해도 누군가는 구조적으로 국가정책에 대
한 ‘협력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센다가 “말하면서 그는 울었다”면서 협력
자의 아픔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협력하도록 만든 나라의 후예로서 그런
아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위안부들 중에는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
들이 더 밉다”(『강제 1』, 57쪽),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자기 살려고 남을
죽을 곳에 넣었으니 마찬가지로 나쁘다”(같은 책, 71쪽)고 말하는 이들도 적
지 않다.
사죄라는 것이 ‘미움’을 풀기 위한 응답이라면,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
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 그런 사태야말로 ‘식민지’의 모순이자 ‘조선
인 위안부’의 모순이다. 식민지화란 그렇게, 국가에 대한 협력을 놓고 구성
원 사이에 치명적인 분열을 만든 사태이기도 했다.
4. ‘강제로 모집된’ 정신대
그렇다면 ‘일본군이 강제로 데려갔다’는 증언들은 무엇일까.
‘위안부’들의 증언은 자신을 데려간 주체가 ‘마을 남자’이거나 모르는 아
저씨였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경찰’이나 ‘군인’이었다고 말하는 경우
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해서 중급 규모의 여자사냥은 전쟁의 확대에 따라 대규모의 여자사냥으
로 바뀌어간다. 대규모로 여성들이 모집된 것은 1943년부터였다. 모집이 가장 극
심했던 것은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이
라고 한다. 그녀들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하에 모집된 것이다.
‘정신대.’ 이 얼마나 그럴듯한 단어인가. 이 ‘정신대’원의 자격은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이었다. 다만 총계 20만(한국 측 추정치)이 모집된 가운데
제1부 ‘위안부’란 누구인가–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3
‘위안부’가 된 사람은 ‘5만 내지 7만’이라고 한다. 모두가 위안부가 된 것은 아니
다.(106쪽)
센다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가 모집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단정한 이유는 “당시 일을 조사한 한국인 신문기자”(106쪽)가 “우선
18세에서 22, 3세의 여성만을 골라 위안부로 만들고, 중년 여자는 군수공
장에 보내진 것 같습니다”(107쪽)라고 한 말에 있는 듯하다. (후에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제기한 윤정옥 교수는 센다의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신대와 위안부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그러던 것이 시간
이 지나면서 애매하게 겹쳐지면서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결과로 만들
어진 기억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위안부’의 모집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정신대’의 모집
은 전쟁 말기, 즉 1944년부터였다. 그리고 정신대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였다. 일본은 1939년부터 ‘국민징용
령’,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국민근로동원령’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14~40세의 남자, 14~25세의 미혼 여성을 국가가 동원할 수 있도록 했는데,
‘12세 이상’이 대상이 된 것은 1944년 8월이었다(일본 위키피디아 ‘여자정신
대’ 항목).
그나마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발동되지 않았다”. 그러나 센다
가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1970년 8월 14일자 『서울신문』은 1944년에 정신
대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이 정신대는 사실상 나치의 소
녀대보다도 잔인했던 위안대. 정신대로 끌려간 부녀자들은 군수공장, 후방기지
의 세탁소 등에도 배치됐으나 대부분 남양, 북만주 등 최전선까지 실려가 짐승
같은 생활을 강요당했다.
본문 일부 발췌합니다.
지금은 삭제된 34곳의 내용도 보고 싶지만 OOOO 식으로 처리되어서 알수가 없지만
내용 읽어보지도 않고 우르르 마녀사냥 식으로 비난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