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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1 19: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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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에 나타나는 간도 용어의 역사를 살펴보면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간도 인식과는 상이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문헌에서 '간도'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80년대이다. 1885년 조 청 국경회담을 마치고 조선 측 감계사 이중하가 고종에게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1877년 종성과 온성 사이 두만강이 갈라지는 곳 에 있는 작은 땅을 주민들이 개간하고 이를 '간도'라고 불렀으며, 그 후 종성, 회령, 무산, 온성 네 읍의 주민들이 점차 두만강 건너편의 개간지를 확대해 나감에 따라 이를 모두 간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초기에는 두만강 맞은편의 개간지를 가리키던 간도 명칭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간도 문제에 개입하면서 그 범위가 남만주 일대로 확대되었다. ……1906년 11월 박제순 참정대신이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보호를 요청한 것을 구실로 일본군의 간도 파병을 결정했다. (중략) 제1차 러일협약이 체결된 이후인 1907년 8월에야 용정촌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개설하여 간도 점령의 첫발을 내딛었다.
……러일전쟁 이후 간도 점령을 획책하고 있던 일본은 간도의 영역을 남만주 일대로 상정하고 간도가 청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1906년에 간행된 『만주지지』에서는 하이란장 이남, 두만강 이북의 당을 간도의 영역으로 파악하고 간도를 한국과 중국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국으로 소개했으며,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대륙 낭인들의 견해가 신문에 자주 실리곤 했다. 또한 통감부와 일진회는 간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간도의 범위를 하이란장 너머 지린 지방까지 확대시켰다.(중략) 1909년 '간도협약' 당시 당사국이었던 중국과 일본은 간도 문제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을 취했다. 일본이 만주 침략을 위하여 간도 문제를 날조했다고 생각하는 중국은 간도 명칭을 거부하고 간도 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반면 간도 문제를 조선 점령과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생각한 일본은 간도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간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이러한 대립은 간도 귀속 문제를 결정하는 조약 명칭에도 반영되어, 중국 측의 조약 명칭은 「도문강중한계무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이며, 일본 측의 조약 명칭은「간도에 관한 일청협약」이다. '간도협약'으로 간도의 영유권은 중국에 귀속되었지만 중국은 일본의 영토 침략에 맞서 영토주권을 수호했다는 생각이었고, 일본은 자신의 영토인 간도를 중국에게 넘겨주었다는 생각이었다. 이처럼 간도 용어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국경 문제로서 간도 문제가 제기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대한제국)의 간도 인식과 일본의 간도 인식이 달랐다. 조선은 두만강 대안 지역의 조선인 개간지를 간도라고 부른 데 비해 일본은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범위를 간도라고 불렀다. 또한 조 청 국경회담이 벌어지던 1880년대에도 간도 명칭이 출현했지만 간도 귀속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중략)
이러한 간도 인식의 차이에 주목할 때, 오늘날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인식이 일본의 간도 인식, 즉 '통감부간도파출소'의 간도 인식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일본의 침략성을 근거로 간도협약 무효를 제기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의 인식 속에 있는 간도는 통감부간도파출소에서 간도 점령을 위하여 만들어낸 간도의 이미지인 것이다.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국수적인 고토 회복 의식은 간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중국 측의 입장에 반대하면 할수록 만주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서 간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와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배성준(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간도」,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사 296~299
무려 통감부와 일진회의 후예들.
지들이 애국 보수라 착각하는 버러지들이 있죠?
어서 가서 걔들과 놀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