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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01: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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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년 백강전투때 현해탄을 건너온 왜군수가 3만여명이었습니다.
임진왜한 천년전에 가능했던 한반도 공격에 물자수송이나 보급이 문제가 되리라고 보이진 않습니다.
그리고 왜란당시 전진기지였던 나고야에서 부산까지가 배로 하루면 족합니다.
(부관페리가 6시간 정도 걸립니다. 지금 배의 4분의1속도로 보면 하루가 걸리죠)
마지막으로 징비록 기록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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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祖 26년(1593) 이후 임진왜란이 끝날 때(1598)까지 영의정 겸 三南 도체찰사를 역임하며 뛰어난 戰時행정 역량을 발휘한 柳成龍(유성룡)은 그가 쓴 ‘懲毖錄(징비록)’에서 閑山島 해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당초 敵은 수륙 양면으로 합세하여 서쪽 방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한번의 싸움에서 李舜臣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완전히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성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전진을 못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보존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군량을 조달하고, 나아가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게 하여 나라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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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해에서 조선수군의 승리로 왜군의 평양이북 전진이 좌절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조선수군이 패했다면 평양까지 수로로 보급이 가능했다는 얘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