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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1: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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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52년에 정조의 대리청정시기에 정조가 직접 영조에게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정축년부터 임오년까지)을 지울것을 상소했고,
영조가 받아들여 세초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사초에 군왕이 손을 못대는게 맞기는 하지만, 조정이 동의하면 불가능한건 아닙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200008
2월에 수은묘(垂恩廟)를 배알했는데 수은묘란 경모궁(景慕宮)의 옛 이름이다. 환궁하여 영종께 상소하기를,
"임오년026) 에 내리신 처분에 대해 신으로서는 그것을 사시(四時)처럼 믿고 금석(金石)같이 지킬 것입니다. 가령 귀신 같은 못된 무리들이 감히 넘보는 마음을 먹고 추숭(追崇)의 논의를 내놓았을 때 신이 만약 그들의 종용을 받아 의리(義理)를 바꾸어놓는다고 하면 그는 천하에 대한 죄인이 되는 것은 물론 장차 종묘 사직에 대한 죄인이 될 것이며 동시에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그 당시 사실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그를 보고 전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듣고 논의하는 자들도 있어 그 소문이 온 세상에 유포되어 사람들 귀와 눈이 그 이외는 듣도 보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신 개인으로서의 애통한 마음은 돌아갈 곳 없는 궁인(窮人)과도 같습니다. 시골 마을에 사는 필부와 서민이라도 비절한 인정이 있고 사리를 아는 자라면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무지하오나 역시 지워버릴 수 없는 그 마음만은 있는데, 지금 와서 높이 세자의 자리에 앉아 백료(百僚)들을 대할 때 어찌 마음이 애통하지 않겠으며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습 니까.
만약 신이 애통해 하는 것이 전하께서 하신 처분과 혹시 상치되는 점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하가 하신 처분은 바로 공정한 천리(天理)에 의하여 하신 것이요 신이 애통해 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인정(人情)인 것으로 이른바 아울러 행하여도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또 《승정원일기》가 없을 경우 후일 그 처분에 대해 증빙자료가 없어진다고 한다면 그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국조(國朝)의 전례·고사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어 금궤(金匱)·석실(石室)에 담겨져 각 명산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천추 만대를 두고 이동을 하셔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데 어찌 꼭 일기가 필요할 게 뭐겠습니까.
아, 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고는 오직 전하의 처분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지만 신 자신이 처할 바로는 다만 저위(儲位)를 사양하고 종신토록 숨어 지내면서 그저 하루 세 때 삼가 기거(起居)를 살피는 직분을 다할 뿐인 것입니다. 말을 여기까지 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창자가 끊기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하늘에 호소할 길조차도 없습니다."
하였는데, 왕은 이 상소를 직접 써서 궁관(宮官)을 시켜 승지에게 전하게 하고는 자신은 백포(白袍) 흑대(黑帶) 차림으로 존현각(尊賢閣) 앞뜰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영종이 하교하기를,
"이 상소 내용을 들으니 슬프고 측은하게 느껴지는 내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구나."
하고는, 영종도 울고 제신들도 다 울었다. 그리고 이어 기거주(起居注) 기록 중 정축년 이후 임오년까지의 내용 중에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은 모두 실록(實錄)의 예에 따라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왕을 명하여 수은묘(垂恩墓)에 가 배례를 올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