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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4 20: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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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이유(이도의 총명함, 이제의 방약무인함 및 비행)가 있었겠으나 실록에 보면 아버지 태종에게 결정적으로 대든 기록이 있습니다.
첩이었던 어리와 관련된 일이었는데 독재군주 태종이 이를 결정적인 폐세자의 사유로 여긴듯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805030_001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30일 기묘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세자가 내관 박지생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를 상서하다
세자가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手書) 를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通)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臣)의 여러 첩(妾)을 내보내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차니,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하여 구하지 않으십니까?
중략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어야 하는데, 신효창(申孝昌)은 태조(太祖)를 불의(不義)에 빠뜨렸으니 죄가 무거운데 이를 용서하였고, 김한로(金漢老)는 오로지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을 뿐인데 포의지교(布衣之交)348) 를 잊고 이를 버려서 폭로(暴露)하시니, 공신(功臣)이 이로부터 위험하여질 것입니다.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는데 일체 죽(粥)도 마시지 아니하니, 하루 아침에 변고(變故)라도 생긴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일호(一毫)라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중략
세자의 사람됨이 광포(狂暴)하고, 미혹(迷惑)하고, 음란하고, 오락을 즐기고, 말을 달리기를 좋아하고, 유생(儒生)을 좋아 하지 아니하고, 학문(學問)을 일삼지 않았다. 매양 서연(書筵)에는 병이라 칭하고 나오지 않다가, 서연관(書筵官)이 두세 번씩 청한 뒤에야 혹은 나왔다. 강론(講論)하는 스승이 앞에 있으면서 전에 한 말과 지나간 행동을 이끌어다가 되풀이하여 이를 타일러도 전심(專心)하여 이를 듣지 않았다.
제(禔)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으로 맹세의 글을 지어서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어리(於里)를 김한로의 집에 숨겨 두고 다시 전(殿)에 들이었다가, 일이 또 발각되니, 임금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통절(痛切)히 이를 꾸짖어 거의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하였고, 또 김한로를 외방에 유배하였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2장이나 부진(敷陳)352) 하여 심히 무례(無禮)하였다. 이에 조말생에게 명하여 세자의 글을 가지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박은(朴訔) 등에게 보이고 말하였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不孝)하였으나, 그러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 낼 수가 없어서, 나는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고자 하였다. 다만 직접 그 잘못을 말하여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