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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9 20: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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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할 부분이 여러군데 있지만 먼저 조선후기에 신분제도가 고착화되어갔다는 주장에 반론을 드립니다.
종합하면 조선후기로 갈수록 서얼의 정치참여가 늘어나고 중인들이 관직에 진출하며, 서민들이 향교생원이 되고 지방향임(향약의 임원)이 되며, 노비가 혁파됩니다. 신분제와해의 증거가 너무나 많아서 열거하기 조차 힘드네요.
1. 서얼의 정치·경제적 지위향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34_0020_0020_0010_0030
요컨대 서얼들의 벼슬길 진출은 일찍이 18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져 18세기말경인 정조대에 이르면 縣監 元重擧, 校書校理 成大中, 五衛將 吳正根, 縣監丁俱祖, 察訪 李鴻祥, 禮賓寺 參奉 李命圭, 奉常寺 主簿 崔粹翁, 承文院 檢校 金洪連, 司䆃寺 直長 南鳳秀, 東部 都事 李可運, 檢書官 朴齊家·柳得恭·李德懋 등 30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청현직이나 고위직의 취임이 불가능하였고 평생 동안 중하위직에 머물렀으나 다음 시대를 여는 데 큰 몫을 하였다.
결국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庶孼通淸運動에 앞장선 서얼관료 출신자 중 正言·持平·掌令 등 청현직을 지내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더구나 19세기 말엽이 되면 李祖淵·李範晋·金嘉鎭·閔致憲·閔商鎬·閔泳綺·李允用·尹雄烈·安駉壽·金永準 등 청현직을 거쳐서 대관에 이른 자가 많았다.
그 외에 金玉之班은 일일이 다 손꼽을 수 없을 정도였고 서얼이 조관의 5분이 3이 될 정도였으며,
특히 노론계의 서얼 중에는 淸宦·達官이 별처럼 많았다고 한다.
2. 전문직 중인의 수령등 관직진출 증가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34_0020_0030_0010_0020_0010
조선 후기에 중인수령을 경기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17세기에 47명이 85자리, 18세기에는 67명이 111자리, 19세기에는 80명이 123자리를 점유하여 인원과 관직에서 19세기가 가장 많았다.
조선 후기에 중인들이 차지했던 수령자리에 찰방·감목관·무관 등을 포함해 보면 17세기에는 66명이 108자리, 18세기에는 121명이 175자리, 19세기에는 118명이 166자리를 점유했다. 18세기가 가장 많았던 원인은 북벌운동 이후 감목관자리가 중인들에게 배정되면서 증가하였는데 특히 운관에게 감목관이 9자리, 찰방은 9자리나 배정되었던 것이 주목된다.
감목관은 조선 후기에 군비증강을 위하여 군마가 필요한 관계로 수령이 겸직하기도 하였다. 3司의 관원 등이 지방에 대한 감시를 겸해 파견되던 찰방직에 18세기에도 중인출신이 27명이나 파견되었고, 19세기로 가면서 많은 역관이 수령직에 기용되어 시대가 내려오면서 증인수령이 많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3. 서민의 신분상승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34_0020_0040_0020
서민들의 신분상승운동의 양상을 그들이 이용했던 몇 가지 방법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향교에의 冒屬을 들 수 있다. 서민의 자제는 향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조선 전기와는 달리 16세기 이후가 되면 군역을 피하는 수단으로, 또는 신분상승을 위한 방편으로 향교에 입학하는 경향이 보편화되었다. 인조 22년(1644) 落講校生充軍法이 시행되자 양반들은 額內校生으로서의 입학을 회피하고 대신 서얼·평민의 자손들이 입학하게 되었다.
인조대부터 이미 경제력이 있는 평민이 교생신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교생의 대다수를 이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신분상승을 이룬 서민층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울산의 경우, 상민호의 비율이 영조 5년(1729)에는 59.78%였던 것이 고종 4년(1867)에는 33.96%로 격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의 호적대장을 분석하여 일반적으로 밝혀진 양반호구의 격증, 상민호구의 격감, 노비호의 실질적 소멸이라는 결과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다른 신분에의 모속현상은 영·정조대 이후에 더욱 심해져 갔다. 호적제도의 문란으로 인한 호적의 개변이나 재력있는 농민들이 이른바 換父易祖의 방법으로 몰락양반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족보에 끼어 들어가는 방법 등이 가능해져 재력있는 서민층들의 상당수가 신분상승을 이룩하는 통로가 열려있었던 것이다
4. 내사노비의 혁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34_0020_0050_0040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 일색으로 정부가 구성되자 사태는 일변하여 그 이듬해인 순조 원년(1801) 정월에 곧바로 내시노비를 혁파하여 이들의 신분을 양인으로 상승시켰다.이 때 양인신분으로 전환된 노비신분층은 내수사를 비롯한 각 궁방의 내노비 36,974명과 중앙 각사의 시노비 29,093명 등 모두 66,067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