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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18: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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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인과님에게 비약이 있다고 한적 없습니다. "본문 글에 비약이 있다고는 생각됩니다만" 이라고 했죠.
본문 글이란 인과님이 작성하신 댓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별천지장님이 작성하신 본문 글'을 뜻합니다.
비약은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할 뿐, 주장을 부정해야 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개소리라고까지 할건가라고 한거죠.
그리고 저는 님의 비약에 대해서 지적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인과님의 댓글에도 비약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들어 환경적 스트레스가 생명체 변화의 요인이며 생명체 스스로가 변화하진 못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동양이 서양문명을 접하지 못했다면 원근법은 대체 언제 알았을까요?"
(=동양이 서양문명을 접하지 못했다면 원근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예시를 드셨는데,
서양 문명은 원근법을 외부 문명으로부터 전래 받은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원근법을 발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양 미술사 또한 서양문명의 전파라는 단일 요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죠.
실제로 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동양화에서도 원근감을 표현하려는 시도는 있었습니다.
서양에서 원근법이 정립되기 이전인 중국 북송시대 화가 곽희는 임천고치라는 저서에서
묵의 농담을 조절해 원근감을 표현하는 삼원법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스트레스가 있어야만 변화가 발생한다는 근거로서 불충분하죠.
'서양 문화의 전파가 동양 미술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근거에서 '서양 문화의 전파가 없었다면 동양 미술은 변화하지 않았다',
'환경적 스트레스가 있어야만 생명체는 변한다'는 결론을 내는 것은 비약이라는 겁니다.
물론 서양의 원근법의 발명에는 서양 문명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변화가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동양 미술 또한 역사적, 사회문화적 변화가 미술의 변화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변동, 사회문화적 변화는 무엇이 환경적 요인이라고 설명해야 하나요?
인류 문명의 역사는 인류 이외의 환경적 변화가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에 급속하게 변했습니다.
역사시대는 아무리 길게 잡아야 1만년, 이 기간은 기후, 지리, 생태계, 진화의 시계에선 대단히 짧은 시간이며,
환경적 요인의 변화란 거의 없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했고, 단순히 환경적 요인의 스트레스를 받아들여 적응할 뿐 아니라
환경 그 자체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생명 현상은 환경적 스트레스와 생명체의 적응이라고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체 그 자체가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체와 환경은 상호작용하는 것이지, 생명체가 외부환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아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붉은여왕가설도 생명체들 간의 생존경쟁의 상황을 뜻하는 거죠.
얼룩말이 얼룩무늬를 갖게 만든 환경적 요인인 체체파리 또한 생명체이며,
체체파리가 피를 빨아 생존할수 있는 생존환경을 구축한 것이 얼룩말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인 겁니다.
실체는 생명체가 아니라 환경이라고 하셨는데, 개체가 환경으로 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개체는 실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실체란 무엇을 뜻하는지 정의도 불명확하구요.
여기에 대해서 제 의견을 밝힌다면, 문명이란 환경이 실체라고 말씀하셨지만
어쨋거나 현상적으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추상적이고 종합적인 '문명'이 아니라
실재적이고 개별적인 '개인'이라는 겁니다.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수학적 원리를 발견한 것은 그리스 문명이 아니라 피타고라스라는 사람이고,
전구를 발명한 것은 미국 문명이 아니라 에디슨이라는 개인이죠.
물론, 피타고라스가 그리스라는 문명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피타고라스 정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에디슨이 산업이 발전하는 시대에 미국에서 태어나 사업가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전구를 발명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환경적 요인을 무시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제로 피타고라스 정리를 발견한 것은 피타고라스고, 전구를 발명한 것은 에디슨입니다.
이들이 아니라도 누군가 해냈을지 모르지만, 어쨋든 그들도 결국 '누군가'이지 '그리스'나 '미국'이라는 총체적 존재는 아닙니다.
따라서 피타고라스나 에디슨이라는 '개체'와 그리스, 미국의 문명과 문화라는 '총체', 즉 환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공존하는 것이지,
'총체'만이 실체이고 '개체'는 실체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볼수는 없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