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말인지 모르겠는 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확히 하시는게
좋은 답변을 얻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것부터가 배움의 시작이죠...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매우 명징하고 강력해서 이것만큼은 반박할 수 없습니다.
철학적으로 끝없이 생각해서 의심한다면,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도 "철학적으로 끝없이 생각하고 의심한다"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의심을 한다는 것은 의심하는 존재, 즉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필연이라는 의미니까요.
데카르트는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찾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은 왜곡될수 있고, 착시와 착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물속에 잠긴 막대는 휘어져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잠기지 않은 막대는 똑바르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성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추론하여
물속에 잠긴 막대는 빛의 굴절로 휘어져 보이는 것뿐
실제로는 휘지않았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속에 잠기지 않은 막대가 똑바르다는 사실 역시 우리의 지각으로 확인한 정보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말해 마치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는 것처럼,
또는 가상현실의 세계인 매트릭스 속의 네오처럼,
모든 것이 왜곡된 허상의 정보만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요.
데카르트는 그 답으로서, 의심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하는 마음', 즉 '이성'이야 말로 우리의 존재와 모든것의 근원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데이비드 흄이 비판한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의심하는 마음, 즉 이성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주장을 부정한 겁니다.
흄은 지각, 즉 경험이야 말로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고 봤습니다. 우리가 의심하고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은 의심할 대상, 즉 보고 듣고 느끼는 지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물에 담긴 막대가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휘었는지 똑바른지 의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흄이 막대가 휘어보인다고 휜것으로 믿으라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흄은 상상력을 강조했습니다. 예를들어 아래 이미지의 도형은 원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니고 몇개의 곡선, 몇개의 선분들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원과 사각형을 '봅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에, 단편적인 이미지의 나열인 만화로부터 이야기를 읽어내고 생생한 현실처럼 느끼며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단편적인 여러 현상들을 관통하는 세계의 법칙과 원리를 찾아냅니다.
(참고할만한 읽을거리 https://www.google.co.kr/amp/www.bloter.net/archives/234244/amp)
정확한 설명은 아니지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매트릭스에서 빨간약과 파란약이 주어졌을 때,
데카르트는 빨간약을, 흄은 파란약을 선택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데카르트에게는 '이성'이야 말로 매트릭스 세계를 벗어나 진실로 인도해줄수 있는 빨간약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반면, 흄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세계인 매트릭스를 굳이 허위라고 결론내리지 않고, 파란약을 선택하는 것이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