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04
2017-10-21 02:37:41
0
추상적이라고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헷갈리기 쉽죠.
극단적으로 단순한 예를 들자면, 법률은 국가를 통해 합의된 최소한의 정의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실재하는지 헷갈리기 쉬운 이유는, 실재 여부를 판단할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개념은, 아무리 구상적인 대상을 지칭하더라도 정도는 다르지만 추상성을 띄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손목'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중 누구도 손목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손목' 또한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손목의 정의는 '손과 팔이 닿는 부분'이죠.
그렇다면 손과 팔의 경계는 정확히 어디일까요? 어디까지가 손이고 어디까지가 팔인가요? 손목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요?
마치 손과 손목과 팔이 명확한 구분이 없이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실재하는 세계의 상당부분은 연속적입니다.
그러나 개념은 그렇지 않습니다. '손' '손목' '팔'과 같은 이름으로 단속적으로 끊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개념'은 추상적이죠.
그렇다고 하여 '손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손목이라는 개념은 모호하고 추상적이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은 분명히 실재하고 있죠.
정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해왔고, 지역과 사회에 따라서도 다르며,
심지어 개개인에 따라서도 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보편성이 존재합니다.
정의라는 개념은 손목보다도 훨씬 추상적이므로,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불의인지 명확히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다른 예를 들어서 더 설명해 봅시다. '사랑은 실재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종족보호본능과 성욕만 존재할 뿐,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답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죠. 이 답변은 사랑이라는 실존적 현상을 생물학, 심리학으로 환원한 것일 뿐입니다.
마치 '요골 및 척골에 맞닿아있는 8개의 손목뼈와 여기에 이어지는 힘줄,
그 위를 덮는 피부와 혈관은 존재하지만 손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 '정의' 같은 개념들은 사람과 사람,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현상을 지칭합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실제로 살아서 존재하고,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이상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어도 누군가에 대한 두근거림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것이 사랑임을 알 수 있고,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어도 누군가 이유없이 나에게 해를 끼칠 때 그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압니다.
'천국'과 '지옥'은 어떤가요? 이런 개념들은 추상적이거나 지칭하는 대상이 연속적이기 때문에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게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은 단지 개념만이 존재할 뿐,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 실재한다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개념'과 '지칭하는 대상'의 존재여부는 별개의 것입니다.
좀 비약적이지만 유추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A와 B는 다음주 금요일에 만나기로 했다고 합시다.
몇시에 만나기로 했는지, 어디서 만날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어도 이 '약속'은 실재합니다.
만약 A가 B에게 '약속 꼭 지켜라'라고 말한다면, B는 약속의 정의가 비록 모호할지라도 '약속'이라는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이
'다음주 금요일에 만나기로 서로 합의한 사실'임을 압니다.
C와 D는 서로 만난적이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C가 '다음주 금요일에 D와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주장하고 다닌다고 합시다.
이 때 C의 '약속'이라는 '개념'은 A와 B사이의 약속이라는 개념과 별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약속'이라는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인 'C와 D가 서로 만나기로 합의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천국'이 단지 그런 개념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란히 놓일 수 없는 것은
그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이 실재하는지 여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비록 그것이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의되고 합의되는 대상이며,
그 결과 합의된 법률이라는 형태로 '최소한의 정의'를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천국'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만, 정말로 신이 인간에게 천국을 약속했다는 증거는 커녕,
누군가 신을 만났다는 사실조차 확인되지 않습니다.
정의가 실재하고 천국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