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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4 14:2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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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통 : 3.1 운동 후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하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에 따라 현재 대한민국의 법통은 거기에서 비롯된다는 게 우리의 일반적 인식이잖습니까? 당시 일제 체제는 강점 상태였고, 우리 입장에서는 미수복한 것이고, 그래서 일제가 물러난 건 분리가 아니라 회복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김동춘 : 그렇죠. 회복인데요, 회복을 주장하는 게 국제 정치에서는 군사력입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이 물론 일본은 한국의 동의에 의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강제적인 것이죠.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주장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한국 외교부나 한국 국제법 학자들이 이것이 강점이라는 걸 입증하는 게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1910년 8월 29일(한일 병합 조약이 공포되어 대한제국이 멸망한 날) 조선에서 전면적 항거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3.1 운동이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점들이 결국 일본의 논리를 국제 사회가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 거죠. 여기서 국제 사회란 같은 진영, 그러니까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제국주의 진영이죠.
그런 냉정한 현실을 우리가 알자. 우리가 투쟁했지만, 일본을 물리칠 정도로 투쟁하지 못했다는 사실, 또 하나는 상당수의 지식인이 일본의 전쟁을 지지했다는 사실, 말하자면 친일파죠. 그리고 미군이 한국의 당시 위치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 사실이 태평양 전쟁 말기 남양군도에서 체포된 조선인 포로들입니다. 이 사람들 중 일본인보다 포로를 더 가혹하게 대해 나중에 전범으로 처형된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일본과 조선이 같은 나라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확실히 조선은 독립국이라는 걸 각인시키는 데 우리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무장 투쟁의 취약성, 상당수의 친일파, 이승만과 같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계속 편지만 쓰면서 독립 운동한 행태들…. 이런 것들의 업보가 1945년 이후에도 우리에게 계속 온 거예요.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런 식의 무장 투쟁한 사람들이 다 남한 사회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대일 협상에서 끊임없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죠. 떳떳한 명분을 내세울 수 없었던 사실이 그 이후에도 계속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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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분은 심히 공감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