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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3 14:5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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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C%A1%B0%EA%B4%91%EC%A1%B0
"연산군 이후 새로운 풍조가 생겼는데,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었고 이로 원기를 배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니 저의 마음이 아프고 애통함을 진실로 다 아뢸 수 없습니다"
라며 답한다.
여기서 조광조의 소격서 폐지 논란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다. '원기를 배양한다'라는 말은 곧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학문의 풍조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진 사림의 등장과 성리학의 성장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앞서 있었던 문묘 배향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을 확고한 성리학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소격서 폐지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다. 소격서는 사소한 관청에 불과하지만 성리학 이념에 그릇된 것이므로, 폐지함으로써 국가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길 원했던 것이었다.
중종이 '사소한 관청'을 폐지하는 데 이렇게 격하게 반대한 이유는, 신진 사림이 국정을 독점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중종은 대간과 의정부의 대신들이 모두 조광조에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볼 때 당시 사림의 득세는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했으며, 소격서를 폐지함으로써 국가의 이념이 성리학이라고 보이는 것은 이들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줄 뿐이라고 보았다. 중종이 신진 사림을 등용한 이유는 반정공신의 득세를 견제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애초에 이들로 독점된 정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던 중종은 이를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한 소격서 논쟁은 예전에 세종 때와 성종 때도 논쟁이 되었으며, 이때 왕이 모두 소격서를 남기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 바 있었다. 중종은 정치 세력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도뿐만 아니라,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신하들의 견해를 물리치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함으로써 적당히 왕의 권위를 세우길 원했던 것이었다. 과거에도 관철된 선례가 있었으므로, 중종 역시 이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격서의 경우는 또 다른 의미가 존재하는데,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즉 형태상으로 조선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점에서는 중국의 천자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등 왕권을 강하게 상징하는 것이 소격서이고, 그곳에서 지내는 초제이다. 같은 역할을 고려시대에 하던 팔관회가 조선건국과 동시에 불교적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미신이라느니 도교적이라느니 하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조선의 왕들은 소격서와 초제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