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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7 04: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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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 요리책
나는 요리책입니다.
나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질투를
일으키거나 시기를 품지도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어떤 전술이나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나는
요리책입니다.
나는 당신을 웃게 하지도 울게 하지도
못합니다 나에겐 갈등도 반전도 없으니까요
또 나는 당신으로 하여금 외치게 하지도
침묵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니까요 물론 당신을
침대에서 일으키지도 못하고
라디오를 켜게도 끄게도 못 합니다
단지 나는
요리책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음탕한 욕설을 배우지도
못할 것이고 총쏘는 방법이나 주먹질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뿐 아니라
당신들은 나에게서 색다른 피임법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며
구린내나는 부패의 냄새를 맡거나
으시시한 부정의 그림자를 느끼지도
못할 것입니다 나는
요리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나에게는
행운당첨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서 기관총을 든 특공대가 튀어 나오지도
않습니다 또한 나는 구음성교를 권장하지도
동성연애를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녀간의 정상적인 사랑을 찬미하지도 않고
실연에 대처하는 열두 가지 방법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요리책이니까요.
하므로 이화효과를 노리지도 정신적 배설을
노리지도 않습니다 나는 상징하거나 은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회적이거나
풍자적이지도 않죠 더더욱이 자동기술법이나
자유연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말이지 나는
구조주의나 원형이론 따위와 관계가 없고
현상학을 응용하지도 않습니다 새로운
학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
말씀입니다 나는
요리책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을 모욕할 의사가 없을 뿐더러
여론에 호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신비극을 보여주거나 막간극을 보여주지도
않죠 나는 당신의 반응에 박수를 치거나
당신으로부터 박수를 받고자 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교훈을 주지도
꿈을 지니라고 충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당신 멋대로 하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요리책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사상투쟁을 하도록 이론을 제공
하지도 않고 민중봉기를 부추기지도
않습니다 나는 또 정부를 선전하지도
기성세대를 대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어떤
주의와 종파를 지지하거나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존재는 누구에게나
긴요하게 쓰여집니다 나는
요리책입니다.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청하,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