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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6 20: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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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전공자만큼은 아니지만 저는 철학 꽤 좋아해서 철학서들 꽤 읽어봤는데, 철학도 상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과학에 비할바는 아닌 거 같습니다.. 수학적 공리가 힘을 잃는 상황이 온다면 인간의 '직관', '보편' 같은 수많은 철학의 시작점들도 별 힘을 가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에요. 예를 들어서 롤스가 정의에 대해서 논할 때 무지의 베일을 쓰고 '보편적 직관으로 합의된' 사회를 얘기하면서 정의의 사회를 이끌어내지 않습니까? 그 보편적 직관의 합의라는 개념이 수학적 공리만큼 객관적인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실제로 샌델도 그런 식으로 비판했잖아요? 무지의 베일을 쓴 사람들 중에서 약간의 불평등에 합의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고. 오히려 수학적 공리에 비해 이견이 생기기는 철학이 훨씬 더 쉬울 겁니다.
전 근데 이견이 생긴다는 게 딱히 나쁜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그냥 학문의 성질이죠.. 학문의 객관성이라는 단어는 좋게 쓰면 '절대성, 진리성'이 될 거고, 나쁘게 쓰면 '경직성'이 되는 단어죠. 어쨌거나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그 객관성이 가장 우수한 학문일 거라는 생각입니다. 아마 객관성을 기준으로 학문들을 줄 세운다면, 그 꼭대기에 수학과 물리학이 올 거예요.
친한 친구가 철학과 학생인데, 그 친구가 서강대에서 학부생 철학 컨퍼런스 같은 데 참여해서 발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고맙게도 절 불러줘서 청중석에 앉아서 들었죠. 다른 학생들, 다른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철학에는 '과학철학'이라는 것도 유행하는 모양이더라구요. 극단적인 어떤 교수님은 철학은 그 자체만으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과학과 합쳐져야만 한다는 식의 주장도 한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철학이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해요. 과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학문이라면, 철학은 '선'을 추구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학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옛날에 '우생학'이라는 과학이 유행한 적이 있었어요. 우생학의 내용을 정리하면 대충, '소를 품종 개량해서 젖이 더 많이 나오는 젖소를 만들거나 고기가 많은 돼지를 만드는 것처럼, 인간도 자연선택을 모방한 artificial한 selection으로 종 개량이 가능하다.'는 이론이었죠. 우생학으로 아주 유명한 과학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유럽의 어느 정치인한테 편지를 받았어요. "당신의 우생학에 정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이 우생학 논문을 제 인생의 두 번째 성경으로 삼겠습니다."라는 편지였죠. 실제로 그 정치인은 나중에 그 우생학자를 불러다 상도 줬습니다. 그 정치인이 당시 독일 수상이었죠.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우생학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홀로코스트를 저질렀죠. 그가 보았을 때 열등한 인간 개체인 '유대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신질환자' 등을 모두 죽여버리면, 지금 당장 그 핏값에 모두가 괴로워하겠지만 그들의 gene이 모두 멸종해버렸기 때문에 후대의 인간은 더 우월해질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죠.
사실 우생학은 과학적으로 틀린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키가 180이 안 되는 남자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그 다음 세대에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도 다 자랐을 때 180이 안 된다면 모두 죽여버리는 식으로 selection을 30세대 정도 걸쳐서 수행한다면, 30세대 후에 태어나는 남자들은 전부 키가 180이 넘을 거예요. 유전적으로 진화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냥 객관적인 '사실'이죠.
문제는 키가 180이 안 된다는 게 '열등한' 것인가 하는 거죠.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열등함을 판단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거예요. 젖소는 젖을 많이 생산하는 게 목적이고, 돼지는 고기를 많이 만드는 게 목적이지만, 인간에겐 목적이 없잖아요? 실존주의가 말하길,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라고요.. 히틀러나 그 우생학자가 실존주의를 알았다면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반대로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에 완벽하게 성공했다면, 지금 스티븐호킹 같은 천재 물리학자도 없었을 거고요.
결국 과학과 철학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문학이 멸종해가는 요즘이 안타깝죠. 조만간 실존주의를 몰라서 홀로코스트를 저지르는 사회가 올지도 모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