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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14: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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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전공이 생명과학인데요, 정신이 사유하는가, 뇌가 사유하는가는 사실 철학보다는 과학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철학의 기차가 달려가는 마지막 종착역은 정치이기 때문이죠. 그 출발이 과학적으로 튼튼하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외부 세계와 구별되는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튼튼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뇌과학은 그에 대해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져왔습니다. '뇌'라는 것도 세포가 밀집하여 화학 물질들을 주고받으며 기능하는 인체의 기관일 뿐이고, 그것이 인간의 사유 능력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그것이 전부인지, 인간의 사유라는 것은 사실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 날카로운 질문과 연구 결과들을 수없이 내놓았죠.
전공자로서 제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입장입니다. 자유 의지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생물'이라는 것 자체가 자연의 한 현상에 불과합니다. 미시 세계로 내려갈수록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는 아슬아슬해지다 못해 없어져버리거든요. 한 생물 개체, 하나의 '종'의 identity는 너무나 희미합니다. 인간을 개와 구별하는 유일한 증거는 DNA 염기 서열의 차이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DNA 내에는 인간의 먼 조상-Homo가 아님은 물론이고 다세포 생물이 아닐수도 있는-시절부터 인간의 DNA에 기생한 수많은 바이러스들의 DNA가 들어있습니다. 그들이 현생 인류를 진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고 현재는 현생 인류, 호모사피엔스의 DNA의 일부로 살고 있죠. 결국 바이러스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Identity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identity도, 바이러스의 identity도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구분된 생물이 아니라면, 독립된 생물 개체라는 것은 사라져버리고, 개체 단위의 구별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 역시 없어지고 맙니다. 그저 자연이라는 거대한 관념 속에 함께 뒤섞여있을 뿐이죠. 생물이라는 개념 자체가,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의 한 현상에 불과하다면 그 생물의 막대한 역사 중 지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조막만한 지능과 자유 의지가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하지만 저는 좀 더 희망적인 얘길 하고 싶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생체기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지하는 자연성을 초탈한 가치를 가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수많은 원시 세포들이 외부 세계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눈을 발명했고, 더 발달한 다세포 생물들이 청각이나 후각 따위를 발명해왔습니다. 외부 세계를 조작하기 위해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는 편모나 섬모 따위를 발명했고, 극단적으로 발달한 현대 인류는 손 같은 기관을 가지게 되었죠.
자유 의지가 자연의 산물이고 현상에 불과하다해도, 그것이 대체 철학에서 무슨 문제가 될까요? 인간의 손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거라고 해서 가치를 잃지 않습니다. 자유 의지는 외부 세계를 더욱 잘 이해하고 더욱 정교한 생존 양식을 채택하기 위해 생물들(인간 뿐 아니라 고도의 지능을 갖춘 다른 생물도)이 발명해낸 강력한 수단 중 하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