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2013-02-21 21:43:23
8
얼마 전에 이런 주제로 글을 하나 썼는데, 그 때 공부했던 게 조금 있어서 미약한 지식이지만 반론을 좀 해볼게요.
ssssa님의 주장은,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것 없이 이성적으로만 판단해서 다른 개개인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소시오패스)은 생존 경쟁에서 가장 유리한 진화된 인간형이다."
라는 것이죠.
여기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물학적인 개인의 자기보존이다."라는 것이구요,
또 하나는 "다른 개개인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을 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라는 것입니다.
1)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자기보존인가.
제가 글을 쓸 때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책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펴낸 "도구적이성비판"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거 서구 문명에서는 객관적 이성(Logos)의 개념이 사회 또는 자연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객관적 이성의 측면에서 올바른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등의 관계를 철학적, 법적으로 정립하려 애썼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현대 문명으로 넘어오면서 개인의 자아가 사회와 분리되고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실증주의가 대두되면서 과학적,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어떤 진술도 의미가 없으며 객관적 이성의 개념과 같이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은 단순히 미신적인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강한 힘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옛날 서구에서는 멀리 가면 그리스로마신화, 가까이에는 기독교와 같이 절대자의 개념과 결합한 어떤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걸 추구했는데, 현대에는 그런 내용들이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 식입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객관적 이성이 주관적 이성으로 변한 게 아니라, '이성'이라는 개념 안에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이 모두 있었는데 현대 문명으로 넘어오면서 주관적 이성이 전면화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ssssa님이 말씀하신 소시오패스는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인의 가장 극단적인 인간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우정, 사랑, 정의, 도덕 등의 가치들도 객관적 이성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그러한 가치들의 실질적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으니까요. 따라서 소시오패스는 객관적 이성을 폐기하고 완전한 주관적 이성을 정립한 인간형에 속합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 개개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보존이라고 했을 때, 이 자기보존은 주관적 이성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몇년 전 마이클 샌댈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막대한 판매부수를 올렸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객관적 이성 중에서도 꽤 고리타분한 개념으로 볼 수 있는 '정의'에 대한 탐구를 담은 어려운 철학서가 이렇게 높은 판매부수를 올렸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합니다. 소시오패스의 시각에 의하면 정의에 대한 어떠한 진술도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기에 정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거기에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낭비에 불과합니다. 책을 읽는다면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자신의 자기보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기계발서나, 말초신경을 자극해 순간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킬링타임용 소설 또는 만화가 적합할 겁니다. 그런데 주관적 이성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현대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객관적 이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답은 부족합니다. 주관적 이성이 전면화된 그들은 그러한 객관적 이성이 자기보존에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을만큼 이성적이기 때문이죠. 그들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사는 이유는, 그 만큼 주관적 이성이 전면화된 현대 사회에서 객관적 이성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표현을 다시 잠깐 빌려서 쓰면, 소시오패스는 아마 자연에 첫 발을 딛는 원시인의 내면 깊숙한 야망이 그대로 발현된 존재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 모든 것을 생물학적 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야망입니다. 그 원시인이 호모에렉투스였던 시절에는 분명히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자기보존의 새로운 국면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물학적 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후 세계에서의 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모든 생물에게 있지만, 보통 대부분의 생물들은 당장 자연 상태에서의 생존경쟁이 급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서의 자기보존에 대해서 걱정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만들게 된 인간은 사후 세계의 자기 보존에 대한 두려움이 살아있을 때의 자기 보존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가 '정신적 자기보존'의 개념이 탄생하는 지점입니다.
정신적 자기보존은 생물학적 자기보존과 다르게 개인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 삶의 목적 등에 대한 모든 진지한 의문을 포함하게 됩니다. 정신적 자기보존을 위협하는 수많은 내재적 질문들 앞에 인간은 나약하고,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서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킵니다. 그 극치에 도달한 것이 객관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시 얘기하지만, ssssa님이 말씀하신 소시오패스는 객관적 이성을 폐기하고 주관적 이성을 완전한 형태로 발전시킨 인간형입니다. 따라서 소시오패스는 정신적 자기보존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요. 우정, 사랑, 정의, 도덕 등의 여러 의미들을 상실한 채 그러한 가치들을 여전히 추구하는 인간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신적 자기보존에 강력한 부담을 줍니다. 그들이 정신질환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개인의 목적을 생물학적, 정신적 자기보존이라고 전제했을 때, 한 쪽이 거세된 인간형은 퇴화했으면 했지 진화했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겁니다.
2)다른 개개인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을 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가.
여기서는 1)과 조금 다르게 핀트를 맞추어서, 과연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 소시오패스는 생물학적 자기보존에 최적화된 인간형인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소시오패스는 분명 주관적 이성을 완전한 형태로 발전시킨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객관적 이성이 거세된 소시오패스라는 인간형이 그 스스로의 생물학적인 자기보존에 과연 적합한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진화'라는 표현은 개체가 아니라 종에게 사용합니다. 또한 진화라는 표현에는 자연선택이 전제가 되어있기 때문에, 진화한 종은 그 바로 이전 단계의 종에 비해 생존 경쟁에 유리해야합니다. 만약 소시오패스가 기존의 인간형에서 한 단계 진화한 종의 개념이라면 소시오패스로 구성된 사회는 기존의 현대인으로 구성된 사회에 비해 생산성이 높고 생존률이 높아야 할 겁니다.
장하준이 쓴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내용 일부를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장하준은 1990년대 중반 무렵, 세계은행이 일본에서 개최한 동아시아 경제 기적이라는 주제의 회의에 참석해 정부 개입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이 때 청중석의 어떤 일본 신사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금속 공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고베 철강에서 지난 30년간 일한 덕에 철강 제조에 대해 제법 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저도 회사 규모가 너무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회사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반 정도 이해하면 다행입니다. 회계나 마케팅 분야 출신의 다른 임원들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이사회에서는 직원들이 올린 사업 계획을 대부분 받아들입니다.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가정하고 직원들의 동기를 사사건건 의심하기만 한다면 회사는 마비되고 말 겁니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업 계획을 검토하려고 애만 쓰다가 말 테니까요."
이 고베철강 중역의 말처럼, 현대인의 사회는 비록 주관적 이성이 전면화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간들 스스로 객관적 이성을 감성적으로나마 느끼고 있기에 자기 직업에 대한 직업정신, 자긍심, 회사에 대한 충성심 따위의 '개인의 생물학적 자기보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객관적 이성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들이 이타적인 행위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회사의 생산성을 높이며, 결국 그들의 연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생물학적 자기보존에까지 긍정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시오패스의 사회는 어떨까요? 그들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존재들입니다. 또한 소시오패스가 모인 사회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될 겁니다. 상대방이 내게 웃으면서 다가온다 해도 그 웃음이 거짓임을 소시오패스는 알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소시오패스의 사회에 고베 철강이 있었다면 그 고베 철강은 현대인의 사회에서처럼 높은 생산성을 보이지 못했을 겁니다. 저 중역 신사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가정하고 직원들의 동기를 사사건건 의심하기만 한다면 회사는 마비되고 말 테니까요."
따라서 소시오패스는 생물학적 자기보존에도 적합한 인간형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