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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5 02: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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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중하면, 너도 소중해야 하고, 네가 소중하면 우리가 소중하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소중하더라.
단지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가능하면 피해를 보고싶지 않기에, 딱히 피해를 준다는 생각도 들지 않더라.
허황된 이상일 지라도 내가 너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처럼, 네가 나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그렇다면 나도 너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우리는 모두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럼 너랑 내가 피해를 입지 않더라도 제3의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으면?"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게 좋다고 봐. 그것까지 관여할 건 아닌데."
"아니지, 그건 우리가 나서서 구해줘야 돼."
"하지만 왜 우리가 그것까지 도와줘야 돼? 그러다 피해를 입으려면 어떡하려고."
"도와주는 게 왜 피해가 미치지? 돕는게 당연한 거 아냐?"
누군가를 도우며 사는 삶에서 사람들은 나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고, 내가 그러는 걸 당연시여겼다.
나는 그들에게 나같은 삶을 살라고 말하자 자신은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더라.
너는 왜 돕지 않지? 나는 이렇게 돕는데? 따지자, 이제와서 왜 그러지? 나도 돕는데? 답하더라.
그러면 나는 묻지말고 그냥 하던 거나 하자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됐다.
나도 돕지 말아야겠다. 결심하자 사람들이 왜 그만두냐고 오히려 따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저 선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그것이 당연한 거라는 믿음의 장벽앞에 서버리고 말았다.
무엇이었던 간에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요소였음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실존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고 여겼다.
"누군가를 돕자 정말로 내가 피해를 보더라."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피해를 입는다고."
"그럼 우리가 뭘 해야 할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도와주는 것밖에."
"그럼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도 모르지. 그냥 오지랖이 될 수도 어쩌면 정말 운이 좋아서 영웅이 될 수도 있는 거지."
모든 걸 희생하고 영웅으로 남느냐, 두려움에 그만두느냐.
그런데 희생이 옳은 거냐고 묻는댜면 누구나 희생은 좋지 않은 거라고 말한다.
'때에 따라서'란 경우의 수를 두어 모호한 대답만 할 뿐.
우리 모두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나의 행동을 따르며 자신들도 그렇게 믿어버리는 사람들을 보니 기가 찼다.
내가 행동을 그만두자, 그들은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숟가락만 올려놓은 주제에 되려 쏘아붙이는 코미디다. 그들이 단순히 이상한 거라고 치자.
그럼에도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단지 상상하고 어떻게 됐음 하고 바랄 뿐.
나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누군가가 비록 오지랖이더라도 친절한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그만두고 오지랖을 떨지 않더라도 그들은 친절한 도움을 받는다.
아마도 나처럼 혹은 나를 따랐던 사람들처럼 착해지고 싶어서 한 행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란게 보다 정확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돕겠지만, 순간 내가 정말 착하고 순수하기에 그랬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때 저 앞에 또 다른 누군가가 거리에 나서 나와 똑같이 말한다.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이것 마저도 오지랖일 거라는 생각에 나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거창한 믿음은 희망과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만, 그 믿음이 깨졌을 때 엄청난 공허함을 안겨준다.
나는 당연히 좋은 행위라고 여겼지만, 그것이 다른 의미에서 그리 좋은 의미만은 아니였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부추기는데 나는 단지 옳은 것이라고 여기며 무시하고 다시 나아가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그리고 멈춰서서 에너지를 상실해가는 내가 잘못인가?
단순하게 핑계를 붙이는 거라면 왜 사람들은 나처럼 나서지 않는 거지? 내가 나서고 있기 때문인가?
따지고보면 어차피 누군가가 저기 외치고 있는 사람처럼 내가 아니어도 대신해 나서줄 거다.
게다가 나서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나 계속 나타날 거다. 나처럼 그만두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한 신념만을 갖고 꾸준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자니 뭐가 옳은 건지 알 수 없다.
무엇이 옳은 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 그렇게 믿는 것뿐이라고...
분명한 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존재하는 것부터 모순이었던 것이다.
무엇 하나를 없애버려야만이 삶이 가능하다. 결국 정의와 악의를 가리는 기준에서 그것이 옳다고 믿었기에,
하나를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없애버렸기에 나는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둘 그 이상이 존재하는 순간 우리는 멈춘다. 하나를 정할 때까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라고 말하더라.
그리고 우리는 말한다. 하나를 정해 삶을 다시 가꾸어 나갈 때, 비로소 성장했다고.
다른 의미로 하나를 버리고 희생하는게 성장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성장엔 항상 희생이 동반한다.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깨닫는다는 표현도 비슷하다)
나를 희생하여 남을 성장하게 했지만, 나도 남의 희생을 통해 성장했다.
모두가 희생하지 않고 사는 방법은 정말 있는가?
그러면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치자 그들은 왜 그래야만 하는가?
생명이 소중하자면 저들에게도 그러해야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고 속이는 거 아닌가?
결국 알아차리지 못하고 속은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내가 속는 걸지도 모른다. 종교에서 말하는 악마, 과연 내가 속는 걸까?
나는 분명히 피해를 입었다고 여기는데. 내가 잘못일까?
그러면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 참혹하다는 것 뿐.
분명한 건 내가 삶이 소중하다고 여겼기에 살인같은 것도 나쁘다고 여기는 믿음일 뿐.
매순간 그러한 충동이 일어나고, 수많은 소설 영화에서 드러나듯,
악은 인간 본연이 지닌, 따라다니는 그림자와같이 떼어낼 수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도, 느낄 수도.
그것마저도 이해해보려 한다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밖에 설명할 수 없는데,
그러자면 누구도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왜 이런 삶이 시작됐는지 찾을 수 없어 또 믿는 수밖에.
아이러니한게 남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내 생명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도,
나도 남도 소중하지 않는 내일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으며,
단순히 세상에서 사회라는 틀이 생명은 소중하다고 가르치는 것에 의해서 여겨지는 것도.
무엇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밑바탕을 깔아버리는 것도 다 뭐....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럼에도 믿어야 하는, 그래서 더 가혹하다는 말밖에.
아무래도 극과 극의 차이니까, 중간점에 머무르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라 소개해야하나?
자본주의 앞에 노동이 당연한 것처럼, 그냥 당연하다고 여기며 천국의 맛 사탕을 쪽쪽 빨아재끼는 것밖에.
어차피 죽음 앞에 공평한 인생이지만 왜 금수저 동수저가 나뉘어야 하는지에 의문과
그것이 왜 그게 금수저란 믿음이 생겼는지 묻다가 왜 다들 겁쟁이가 되어가는지 물어보고
그런 모호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목적인, 그러다가 그 목적마저도 빼앗기는게 인생이던가.
어느 것을 상상하더라도 우울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웃어야만 하는 세상이 즐거울 따름.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이미 시작되어서 울고 끝은 멀었으니까 웃어야하나?
80의 노인이 글을 본다면 그도 웃어야 하나? 아직 오늘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