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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소유하겠어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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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 2015-03-22 06:38:57 0
안자는사람!!! [새창]
2015/03/22 04:25:30
오오 감사합니다 ㅋㅋ 티버왤케 귀여웤ㅋㅋㅋㅋㅋ 고생하셨어요^^
1603 2015-03-22 04:52:58 0
[새창]
두 경기 모두 초반에 분위기는 좋게 가져갔는데 그게 아쉬웠죠.
1경기에 코코 쿼드라나와서 기분 되게 좋아서 무난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후반에 2:5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 리산드라한테 트리플킬 당한 장면이 결정적이었죠.

2경기에선 처절하게 무너지는 가운데 엠비션이 있었던 건 사실이죠.
아무래도 사람들은 샤이가 캐리하는 모습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때문에 더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엠비션과 샤이의 합이 안맞은 것도 있지만, 전략적으로도 제대로 팀플레이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봤어요.

사실 이번 1,2경기 가장 큰 패인은 샤이가 아니라, 팀플레이와 전략의 패배라고 생각하거든요.
차라리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뭉쳐서 받아쳤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1경기는 방심한 탓에 역습에 무너졌고, 2경기는 충격 덕분에 딜라인도 덩달아 무뎌진단 느낌이 확왔음.
코코의 멘탈이 분해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함;
그럴만도 한게 상대가 마크를 너무 잘하고 진영을 잘갖춰 싸운 것도 크지만요...

롤경기 요즘엔 자주 못보지만 확실히 GE가 실력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지난 번에 IM 경기였나; 찍어 누르는 거 보고 놀랐던 기억이...
1602 2015-03-22 04:35:30 1
안자는사람!!! [새창]
2015/03/22 04:25:30
블루 골렘에게 붙잡힌 애니를 구하는 티버!
1601 2015-03-22 03:47:16 0
자살에 대해서 [새창]
2015/03/21 23:50:39
아이러니한 것은 첫댓님 말처럼 가장 비열하고 이기적인 죄악이며,
비겁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주어진 사형선고 앞에서 패배를 뒤집어 쓰고라도 희망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겁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일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우리는 해답을 찾지 못하죠. 할 수 있는 건 이분법적 사고에서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
선과악, 흑과백,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 용서와 복수.

일찍이 삶을 끝내는 사람들도 용감하지만,
그 삶을 끝까지 악착같이 버텨내는 사람들도 용감하죠.
그 자체로 모순이에요. 하나로만 정의내릴 수가 없어서...

끝내 연관되는 단어들은 광기, 분노, 좌절, 실의, 절망 속에서 얻는 카타르시스 등
시작은 알 수 없지만, 너무나도 가혹하지만 언제든 그 끝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삶.
제일 가까운 해답은 아무래도 이정도인 것 같습니다.
1600 2015-03-21 23:38:13 0
심심한데 릴레이 소설이나 한번 어떠십니까 [새창]
2015/03/21 02:44:19
비록 허황된 상상일지라도, 나는 무너지는 파란 지붕의 모습을 떠올리며 새어나오는 바람소리를 막아서진 못하였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자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쫓아오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기어코 너에게 따라잡히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 떄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놓았던,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가로등에 묶인 채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자물쇠를 붙들고 있는 뒷바퀴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기어코 쓰레기 더미로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
누구에게 전화를 걸까나?
1599 2015-03-21 23:31:10 0
기형아의 낙태 [새창]
2015/03/21 22:24:19
why not?
1598 2015-03-21 08:51:2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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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1 22:17:37
내일의 태양, 그 막연한 희망은 지금의 고통에 비하면 장대하리라.
책임감 앞에 엇갈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달려가는 우리들의 미래.

이것만 견디면, 내일은 반드시 내가 바라는 대로 태양이 나를 향해 비출 거라는 모순.

아이러니하게도 태양은 둥글어, 언제나 나를 향해 비춘다.
그 태양은 거대하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데, 그 빛은 우리를 통과하지 못한다.
땅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새까만 그림자로 남아있을 뿐.

누구나 책임져야 할 삶의 무게 앞에서 무릎을 꿇어버린다.
그럼에도 내일은 반드시 오직 나를 향해서만 빛날 거라고 믿으며.

30대에도, 40대에도, 아니 나이를 불문하고 그 희망은 계속된다.
야속한 시간의 흐름 앞에 죽어가는 어리석은 노인의 말을 귀담지 말란다.
그들이 말하는 사악한 거짓말에 속지 말란다.
그럼에도 어떤 늙은이들 현명하니, 그들의 말을 믿으란다.

세상의 주인은 오래 산, '언륜'이란 타이틀을 가진 늙은자들을 가리키면서,
제각기 다른 잣대는 참으로 우스울 수밖에,
그럼에도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누구를 위한 고통인가? 왜 우리는 죄인이어야만 하는가?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것은 순전히 자기자신을 위한 길이었음을 기억하라.

지금의 고통은 미래의 행복을 위한 저금이라고 하더라.
누군가가 그랬었다.
사람들이 베푸는 넓은 아량, 선이라는 그 이름을 마음 속에 저금해둔다고.
그러다 씁쓸해지면 하나씩 꺼내어 위안을 얻는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그에게 말했겠지.
"이제 그걸 남들에게 베풀어보는 건 어때?"
그러면 그는 말하겠지.
"좋아, 내가 받았던 것처럼, 너희들에게 돌려주겠어."

누군가가 베푸는 상처들, 악이라는 그 이름 또한 마음 속에 저금된다는 아이러니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10대는 20대를 위해, 20대는 30대를 위해 ..... 60대는 70대를 위해...
그렇게 시간의 흐름 앞에 단지... 행복할 거라는 미래를 준비하기 바쁜 우리.
하지만 준비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길어, 채 이루지도 못하고 만다.
반짝 이루었던 과거는 이미 '실패'로 남아있을 뿐, '성공'은 과연 오는가? 언제오는가?

그걸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나도 늦는다.
그것에 마주한 노인들이 말하는 것은 사악한 거짓말이기도, 현명한 진실이기도 하다.
그들은 더 이상 준비할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이 구조적 모순은 하나로 통일된다.
이미 선고된 사형선고 앞에,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도 제시할 수 없다.
그것들이 옳다 그르다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

남의 말을 믿어버리고 그게 자신의 믿음이라 여기는 아이러니.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모순이 되어버린다.
순전히 당신의 자유의사가 아닌 내 의사대로 행동하기 때문.
그럼에도 우리는 남의 의사를 쉽게 따른다.
그것이 싫음에도,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모순들로 합리화하면서.

그냥 이러한 아이러니한 삶이 곧 우리들의 모습이며,
지독히도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지워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영원히 따라다니는 형벌이라면 형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단지 그것에 대해서 ~했다. 라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말을 아끼며 점차 말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의미없이 내뱉어내는 술자리의 대화처럼, 말 수가 늘어날 수밖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지독히도 쓰고 떫은 차를 마시면서,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웃어보이는 작은 배려.
살아도 사는게 아니지만, 살아가는 것. 싫지만 만나야하는 직장상사처럼...
그리고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것.

눈치없이 "왜?" 묻고 다니는 철없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싶다.
이유를 찾지 못해 삶을 떠나버린 자들에게 향하는 손가락질은..
그 속에서 '교화'라는 이름으로 잊고 살아가는, 남을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은..
어쩌면 재각기 다른 굴레라는 책임감 앞에 무릎꿇고 희망이 오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무엇을 선택하든, 탓을 가리긴 실로 간단하다.
나의 탓이던, 너의 탓이던. 둘 중 하나.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 탓을 돌리려고 한다.
당연하게도 너는 나에게 탓을 돌리지.
서로에게 화살을 돌리기에만 급급한, '질서'라는 이름을 손쉽게 짖밟아버리는 순간.
설령 그 탓을 서로가 나누어 가지더라도, 그게 공평한 무게를 지닐 수 있을까?

그럼에도 당신은 어른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되어야만 하는가?
어쩌면 이미 되었는지도.

찬란할 미래를 꿈꾸며, 오늘의 고통스러운 시간도 지는 태양처럼 안녕.
그럼에도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우리.

그걸 지켜보는 나에겐 참으로 유쾌한 장면이지만,
그들에겐 더할나위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이겠지.
누군가에겐 이미 지나갔다고 여기는 한 잔의 술과 넘기는 안주거리가 되며,
어떤 이에겐 그것 또한 무의미한 것을 깨닫고 슬퍼하겠지.
또 다른 이는 술 마시는 남자의 성공담을 들으며 희망을 품기 시작하고,
다른 누군가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겠지.

그럼에도 삶은 아름답다고 한다.
최후의 승자는 웃으며 죽는 자라고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가 허무의 광기일까, 슬픔 속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는 가식일까?
삶을 추억하는 기쁨일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일까?
1597 2015-03-21 07:45:0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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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1 22:17:37
나는 눈물을 흘린다.
그럼에도 나는 웃는다.

너무나 웃겨서 어이가 없어서 실로 터져나오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그럼에도 그것이 나의 삶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알기에.

누구나에게 공평한 시간, 그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그리고 앞으로 이뤄질 우리의 모습.
이 끔찍한 형벌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거대한 죄의식.

태양은 모든 것의 시초이자, 희망이라는 이름의 함축된, 그리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 꿋꿋하게 내일이면 다시 떠오르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無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해주듯, 물체를 관통해내지 못하여 기어코 그늘을 만들어내는,
곧 우리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도 의미하는 거대한 모순의 집합체.
어쩌면 그가 내뿜어내는 빛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믿음이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라는 이름의 모순은 결코 우리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새까맣게 타버린, 언제는 누구보다 뜨겁게 타오르던 숯과 비슷한데,
지독하게 따라다니는 이 그림자란 이름은 언제나 밝게 타오르며 의지를 쥐어주는 빛이라는 이름 앞에 한결같이 우리를 따라다닌다.
어떤 이들에겐 악마의 의미로, 악의 근원이란 이름으로 상징적으로 비춰지는 그대여,
나는 그대의 이름을 겁쟁이라 부르니, 동시에 또 다른 희망이라 말한다.
비록 반쪽자릴지언정, 그것이 틀린 것 또한 아니라고 미안한 소리지만, 애써 위로한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구석에 숨어버려도,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야속한 빛에 의해 나의 그림자는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를 숨길 유일한 방법은 내가 사라지거나, 그를 숨겨버리거나.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이 특이한 습성은 누구나가지는 마음 깊숙히 숨어있는 두려움이란 이름으로 해석되어버린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럼에도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며 저항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찌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내일의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결국 그것에 맞서는 것, 그리고 남들처럼 오히려 당당하게 웃어보이며 눈물을 감추는 것.
나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 어쩌면 나를 만들어낸 진짜 부모라는 이름의 그대에게 반항하는 것.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고 말하는 누군가들의 말처럼, 나는 기어코 마음에 두고 선의라는 이름으로,
거짓말의 테두리를 둘러싸며 하염없이 웃어보인다.

삶은 싸워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마저도 거짓이 되어버린다면, 나는 더 이상 목적을 잃어버린 방랑자.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던가?
하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차라리 목적의식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때로는 더 유쾌한 법.

차라리 무언가가 나를 재촉하려 하거든, 오히려 그에게 지나가라 길을 비켜주리다.
그러다 비켜주기 싫거든, 그를 앞서 지르리라.

내일의 태양은 다시금 떠오르며 벗어날 수 없다며 잊혀졌던 그림자를 보여주지만, 나는 그 그림자에게 오히려 비웃어주며,
너에게 벗어나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너에게 잡아먹히는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겠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왜일까?

결국 이 가식적인 웃음 앞에 무기력하게 흐르는 눈물처럼,
허세 가득한 말 몇 마디에 손가락 운동 한 번으로 탑이 무너져버리는 것처럼,
너무나 우스워 다시 미소지을 수밖에.

ㅑ)
1596 2015-03-21 04:21:24 1
심심한데 릴레이 소설이나 한번 어떠십니까 [새창]
2015/03/21 02:44:19
그녀는 성실한 기독교 신자다. 누구보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앞선.
메가폰을 집어 든 그녀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거리에 한 축이 된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는 외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관심없는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치지만,
그녀의 뒤로 보이는 작은 천막에 보이는 커다란 문구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홀로 밥먹기도 힘드신 노인분들을 도와줍시다.'
지루함을 느낀 그녀는 잠깐 휴식을 갖자며 의자에 앉았는데. 강렬한 태양빛이 되려 그녀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향해 비추는 태양에게 웃어 보였다.
뜨거운 열기에 무기력하게 저어보이는 그녀의 손짓.
그녀를 통과하지 못하는 빛이 야속하게도 새까만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

그녀를 몹시나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네요. 젠장.
1595 2015-03-19 06:24:1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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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1 22:17:37
실로 가장 간단한 모순이 하나 있다.

신이 없으면 고통도 없어야 하거늘,
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부가가치 말이다.

내가 왜 죄인이 됐는가? 누가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는가?
근본적인 물음에는 안중에도 없는 신타령.

나는 왜 죄인이어야 하는가? 오히려 그것이 궁금할 뿐.
당신은 왜 죄인인가? 우리는 왜 죄인일까?
자기들이 정한 굴레에 빠져버린 자들.
실로 본인은 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니 합리화할 수 있겠지만서도,

내가 죄인이길 부정하는 순간, 나는 죄인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나는 죄인이어야만 한다.
의미에 따라 나는 죄인이며, 죄인도 아니다.
하지만 죄인이어야 하며, 죄인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죄인이었고, 앞으로 죄인이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1593 2015-03-17 05:33:0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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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1 22:17:37
ㅎㅎ
죽음에 반항한 이들과
삶에 반항한 이들의 차이는?

누구의 입장이 되어도, 그들은 서로에게 손가락을 겨누며
"네들이 비겁한 도망자일 뿐이야." 라고 외친다.

그런 서로에게 손가락질 겨누는 세상에서 사는 나.
이런 이방인인 내가 낯선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역시 사람들의 뜻을 따라야 할 뿐.

의심스럽다, 심히.
그럼에도 찾지 못한다.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역시 그것밖에 없는 거란 말인가?

허무와 좌절 속에 얼떨결에 흘러가는 나무짝 하나 집어들고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 것인가?

한 남성이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글쎄 그 아줌마가 나한테 그러는 거요. 너같은 놈이 또 다시 출판사에 책을 내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사람들은 웃는다. 그는 지금 유명인으로써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는 그분을 다시 찾아갔어요. 그러자 그가 저한테 되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손사랠 치며 됐다고 했죠. 왜냐하면 진심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말 덕분에 오기가 생겨 더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 같았거든요."
그의 말이 끝나자 일제히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조용해진 틈을 타, 그는 말을 잇는다.
"그런데 말이에요. 어디에선가 또 다른 누군가가 저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 거에요. 앞날 아무도 모른다고, 그 사람이 성공이라도 한다면, 아마도 저와 이 아줌마의 관계처럼 웃긴 상황이 되겠죠."
웃는 사람들.

ㅎㅎ 웃어야지 :D
재미 없는 세상이 사실인데, 그 속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의문스러운 사람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우습지.
왜냐면 그러한 틀을 깨부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치명적인 오류로 작용하거든.
결국 세상에 '다시 시작'이란 없다.
쌓아올린 탑을 부수더라도, 이미 정립된 개념까지 부서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 자체로는 순수하지 못한 탑이 다시 쌓아올려지는 것.
그걸 반복하는 사람이 대단하겠지만, 반복할 수 없는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

백발의 늙은 노인들이 떠나간 옛친구를 두고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나는 아무래도 그들이 운 이유는,
남의 죽음을 지켜보는 고통때문이리라고 생각된다.
자기가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하는 아쉬움과, 시기 섞인 질투를 숨길 뿐.
미친놈의 소리라고 말하겠지만, 삶이란 그런 것 아닌가?
우리가 노인이 되면 더 이상의 시간도, 희망도 없이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데,

당신이라고 안 그럴까?
당장 주위의 사람들만 보더라도 그런데.

항상 상대적인 의미를 지녀서 비겁한 도망자가 누구에게서 쓰이는지를 주목해야지.
영웅도 누구에게 영웅인지가 중요한 것처럼.
중의적이라는 것이 참... 애석하면서도 애틋하다고 해야할까?

당신은 알고 있을까? 신이라는 이름의 파랑새.
그 형체가 무엇이든, 아는 선에서 만들어내야 하기에 더욱 어려운,
그래서 더 원망스럽고 화가 나게 만드는,
모든 근원적, 근본적 물음의 시작이자 끝인,
그래서 더 알아보고 싶은 그대의 형체.
1592 2015-03-15 07:09:36 0
[새창]
아이러니한 것이.
'늘 일관성을 유지'하라고 말하면서
일관성있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라는 거죠.

전에도 비슷한 글이 올라왔었는데,
그 말이 기억에 남더군요.

어떤 글에 '평가'가 매겨지는 가장 큰 요인은 '첫 댓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즉, 첫 댓글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소린데,
그 말이 꽤 신빙성이 있더라고요.

글의 논지에서 살짝 벗어난 느낌이 드네요.
1591 2015-03-15 06:48:23 0
바람쐬고 왔습니다. [새창]
2015/03/15 02:09:40
그래서 여유가 필요한 법이죠 :D
1590 2015-03-15 03:13:48 0
기억나눔 팔찌 나눔합니다. [새창]
2015/03/14 21:30:24
저도 신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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