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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1 08: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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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태양, 그 막연한 희망은 지금의 고통에 비하면 장대하리라.
책임감 앞에 엇갈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달려가는 우리들의 미래.
이것만 견디면, 내일은 반드시 내가 바라는 대로 태양이 나를 향해 비출 거라는 모순.
아이러니하게도 태양은 둥글어, 언제나 나를 향해 비춘다.
그 태양은 거대하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데, 그 빛은 우리를 통과하지 못한다.
땅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새까만 그림자로 남아있을 뿐.
누구나 책임져야 할 삶의 무게 앞에서 무릎을 꿇어버린다.
그럼에도 내일은 반드시 오직 나를 향해서만 빛날 거라고 믿으며.
30대에도, 40대에도, 아니 나이를 불문하고 그 희망은 계속된다.
야속한 시간의 흐름 앞에 죽어가는 어리석은 노인의 말을 귀담지 말란다.
그들이 말하는 사악한 거짓말에 속지 말란다.
그럼에도 어떤 늙은이들 현명하니, 그들의 말을 믿으란다.
세상의 주인은 오래 산, '언륜'이란 타이틀을 가진 늙은자들을 가리키면서,
제각기 다른 잣대는 참으로 우스울 수밖에,
그럼에도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누구를 위한 고통인가? 왜 우리는 죄인이어야만 하는가?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것은 순전히 자기자신을 위한 길이었음을 기억하라.
지금의 고통은 미래의 행복을 위한 저금이라고 하더라.
누군가가 그랬었다.
사람들이 베푸는 넓은 아량, 선이라는 그 이름을 마음 속에 저금해둔다고.
그러다 씁쓸해지면 하나씩 꺼내어 위안을 얻는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그에게 말했겠지.
"이제 그걸 남들에게 베풀어보는 건 어때?"
그러면 그는 말하겠지.
"좋아, 내가 받았던 것처럼, 너희들에게 돌려주겠어."
누군가가 베푸는 상처들, 악이라는 그 이름 또한 마음 속에 저금된다는 아이러니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10대는 20대를 위해, 20대는 30대를 위해 ..... 60대는 70대를 위해...
그렇게 시간의 흐름 앞에 단지... 행복할 거라는 미래를 준비하기 바쁜 우리.
하지만 준비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길어, 채 이루지도 못하고 만다.
반짝 이루었던 과거는 이미 '실패'로 남아있을 뿐, '성공'은 과연 오는가? 언제오는가?
그걸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나도 늦는다.
그것에 마주한 노인들이 말하는 것은 사악한 거짓말이기도, 현명한 진실이기도 하다.
그들은 더 이상 준비할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이 구조적 모순은 하나로 통일된다.
이미 선고된 사형선고 앞에,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도 제시할 수 없다.
그것들이 옳다 그르다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
남의 말을 믿어버리고 그게 자신의 믿음이라 여기는 아이러니.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모순이 되어버린다.
순전히 당신의 자유의사가 아닌 내 의사대로 행동하기 때문.
그럼에도 우리는 남의 의사를 쉽게 따른다.
그것이 싫음에도,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모순들로 합리화하면서.
그냥 이러한 아이러니한 삶이 곧 우리들의 모습이며,
지독히도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지워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영원히 따라다니는 형벌이라면 형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단지 그것에 대해서 ~했다. 라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말을 아끼며 점차 말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의미없이 내뱉어내는 술자리의 대화처럼, 말 수가 늘어날 수밖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지독히도 쓰고 떫은 차를 마시면서,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웃어보이는 작은 배려.
살아도 사는게 아니지만, 살아가는 것. 싫지만 만나야하는 직장상사처럼...
그리고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것.
눈치없이 "왜?" 묻고 다니는 철없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싶다.
이유를 찾지 못해 삶을 떠나버린 자들에게 향하는 손가락질은..
그 속에서 '교화'라는 이름으로 잊고 살아가는, 남을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은..
어쩌면 재각기 다른 굴레라는 책임감 앞에 무릎꿇고 희망이 오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무엇을 선택하든, 탓을 가리긴 실로 간단하다.
나의 탓이던, 너의 탓이던. 둘 중 하나.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 탓을 돌리려고 한다.
당연하게도 너는 나에게 탓을 돌리지.
서로에게 화살을 돌리기에만 급급한, '질서'라는 이름을 손쉽게 짖밟아버리는 순간.
설령 그 탓을 서로가 나누어 가지더라도, 그게 공평한 무게를 지닐 수 있을까?
그럼에도 당신은 어른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되어야만 하는가?
어쩌면 이미 되었는지도.
찬란할 미래를 꿈꾸며, 오늘의 고통스러운 시간도 지는 태양처럼 안녕.
그럼에도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우리.
그걸 지켜보는 나에겐 참으로 유쾌한 장면이지만,
그들에겐 더할나위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이겠지.
누군가에겐 이미 지나갔다고 여기는 한 잔의 술과 넘기는 안주거리가 되며,
어떤 이에겐 그것 또한 무의미한 것을 깨닫고 슬퍼하겠지.
또 다른 이는 술 마시는 남자의 성공담을 들으며 희망을 품기 시작하고,
다른 누군가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겠지.
그럼에도 삶은 아름답다고 한다.
최후의 승자는 웃으며 죽는 자라고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가 허무의 광기일까, 슬픔 속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는 가식일까?
삶을 추억하는 기쁨일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