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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4 17: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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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L을 끊었다.
전쟁을 멈추는 방법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다른 한쪽이 굴복시키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전쟁을 멈추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승리도, 패배도 그 무엇도 아닌.
"에라이 비겁한 새끼야, 열댓살 먹은 애도 너보단 철이 더 들었겠다."
처음 전쟁에서 도망쳤을 때, 이곳은 낯설었다.
낯설다는 말이 무엇이냐하면, 이것이 내가 아니라는 이질감을 느꼈다는 것이 맞다.
도망치지 않는 나, 전쟁에 맞서 그것이 비록 승리를 가져올지, 패배를 안겨올지 한치 앞도 모르는 비극을 겪는 것.
그리고 도망치는 나, 끊임없이 방황하며 내가 내가 아님을 부정해야만 하는 더 거대한 비극.
"네 인생 네 거잖아. 이제 너도 어른이잖아? 왜 아직도 어린애새끼처럼 구냐."
무릇 어른이라 한다면,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지고서 그 책임을 소신껏 등에 업고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고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싶지도 않다.
그러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기준이 너무 애매하다고 결국 무엇도 아니었다고 말할 뿐이다.
분명 사람들은 말한다. 이도저도 아닌 줏대 없는 인간아, 그렇게 살아서 뭐할래?
그런 생각들은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록 나는 고통이 무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들을 잊으려는 나는 나를 컴퓨터 책상 앞에 박제시켜 버린다.
LOL을 켜면 신난다. 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부정하는 나와, 내가 부정하는 내가 무슨 차이일지 나는 떠올려본다.
책상 앞에서 헤어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의 존재와
사람들 앞에서 미소를 짓는 세련된 현대인의 존재 중 무엇이 '옳은' 것인가?
LOL을 처음 접하고 난 뒤, 오기가 생겨 시작한 것이 재미를 넘어 열정을 갉아먹고 갈망했다.
30레벨을 달성하고 처음 랭크게임을 뛰었을 때,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한 것이 분했다.
그들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프로게이머처럼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인정받는 정도.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사실 이 전쟁의 목적은 단순한 승리를 위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규칙이고 섭리이며 진리였으니까.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더욱 무자비하고 횡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계급의 탑을 쌓아가고 쌓아가 승리를 쟁취한다.
오직 그것만이 내 목적이 될 수 있었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승리 그것 하나만.
"남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제대로 씻지도 생활하지도 먹지도 않는 새끼가 사람이냐? 짐승이지."
아침 혹은 밤. 중요한 건 일어나는 시간이 아침이고, 자는 시간이 밤이다.
눈을 뜨면 컴퓨터로, 눈을 감고 싶을 땐 침대로.
같이 플레이하는 게임 친구들이 하나 둘 게임을 떠난다.
이유는 다양하다. 학교, 직장 때문에, 연애나 공부, 다른 문제들 덕분에.
물론 다들 상위권 랭크에 있다보니 다들 게임이 조금 질리는 모양이었다.
저마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식당에서 조촐한 식사를 함께하고, 술자리에서 알딸딸하게 취해 고성도 지르는,
저마다 다르지만 저마다 엇비슷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내가 낄 자리는 없었지만, 처음으로 나도 그런 자리에 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같은 놈이 그런 걸 한다고? 작심삼일이라고 얘, 말을 말아라."
방 안에 쳐박혀있는 나의 모습은 이제 당연시된 일.
뭔가 사람들에게 뛰어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다시 방구석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도망치는 것, LOL을 하는 것 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상위권 랭크에 도전하고, 나는 그들을 보며 말한다.
"상위권 랭크도 별 것 없어요."
달려온 목적에 비하면 이곳은 단순한 애벌레의 욕심이 만들어낸 욕망의 탑에 불과했으니까.
LOL을 보면서 생각한다. 게임을 하는 것도 짜증스럽고,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내가 죄스럽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내가 남들처럼 될 수 없다는 절망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게임을 하면서 무뎌져가던 고통의 무게가 다시금 떠오른다는 것을 알기에,
이것을 그냥 단순히 지나가기만을 바라지 않았다.
무엇도 할 수 없는 고장난 자동차를 타고 있는 내가 이 무의미한 전쟁을 참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남을 짖밟고 올라가야만 하며, 그러지 않으면 내가 떨어져야만 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저 높은 탑 위에는 무엇이 있을지 상상을 그리며 그것이 무엇이던 내가 바라는 것 이상이라고 여겼다.
그 작은 희망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지만,
이미 거대해진 희망은 모두 거짓이었음을 말해주는 탑의 꼭대기에서 나는 깨달았다.
도망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고.
내가 삶에서 도망친 이유처럼, 이 작은 세상에서 마저도 도망친다면
내가 숨을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드러난 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보고 싶지도 않다.
세상은 여전히 드러나는 나에 대해서 손가락질 하지만,
나는 이 방구석을 피난처삼아 그들에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 작은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숨길 수 있다.
이름, 나이, 성별, 심지어 성격까지도.
"오늘 바깥에 날씨가 좋아졌던데, 이런 날에 드라이브하면 분위기 짱인데."
아무 것도 없는 내가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패배하지도 않아도 되는 곳.
그런 사소한 규칙에 위배되지도 않으면서, 내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곳.
나를 속박하는 세상에서 무엇도 나를 속박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LOL을 끊었다.
그러나 이 작은 세상은 끊지 못했다.
// 게임중독이 문제일까? 그렇게 만드는 세상이 문제일까?
그 사람이 문제일까? 그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문제일까?
재밌는 세상^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