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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3 12: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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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현대인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언제나 묻는 난해한 질문들에 대하여 해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쳐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해답이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 계속해 꼬리를 물지만 사실 그 연장선상에는 이미 세워진 한계점으로
우리를 미리 차단하고 있는 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에 대하여
현대인들은 크게 반증을 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연대감을 갖는 것, 그 속에서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
비록 자본주의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고통이 있지만
그것에 비하면 내가 지금 누리는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앞선,
우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 탐구하는 '중독자'들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붙여도 어울리는 중독자에게 이중, 삼중 잣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스꽝스럽습니다.
본론으로 들어와 제가 진짜 묻고 싶은 것은 그렇습니다.
나를 사회에 속하게 만든 것과 나를 사회에 구속시키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이 증명할 이유는
복잡한 문제에 해결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보다야 그것을 인정하고 나를 구속시키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잣대를 펼치는 우리를 보자면,
그런 문제의 본질은 당연 반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어기고, 도덕관을 상실한 비이성적인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우리는 말합니다.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야."
처벌을 해야 할지, 용서를 해야 할지보다 우리는 그 죄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 이후에 연민의 감정과 분노의 감정이 뒤섞이던지 따로 놀며 서로 소리치겠지요.
물론 국가와 사회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은 당연하지만,
저는 이것에 대하여 우리가 스스로 동의한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일종의 선언이나 약속도 하지 않은 반강제적 동의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합니다.
선택권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 보장하는 것을 누리고, 소리쳐야만 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완벽을 꿈꾸는 저야말로 가장 사치를 꿈꾸는 망상가라고도 할 수 있죠.
모든 것은 당연하다는 명목 하에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정치적(난장판)으로 파면을 당하고 이단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어떤 사상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어느 것은 멸시당하고 어느 것은 환대 받죠.
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 즉 사회에 대하여 사람들의 시선은 점차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갖게 해달라는 주장을 펼치고,
저마다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키코모리가 과연 시대적인 비극으로만 보아야 할 것은 아닙니다.
예로부터 마약, 도박 중독자들에 행위는 '하등한 인간'으로만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가두고 있는 그 벽을 허물어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결국 같은 처지에 시달리는 불쌍한 인간이 아닙니까?
보수적이고 나발이고 그런 '가르기 위한 기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자신을 변화시킨 어떠한 생각의 충돌, 예술 작품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발전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지적인지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스스로 지금까지 쌓아올린 삶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삶이 그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기계라면 적절한 비유일까요?
'기계화'가 단순히 단단하고 차가운 스테인레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차갑게 더 단단하게 굳어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고 봐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쌓여진 가치관에 대하여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당연하기 떄문입니다.
'선생님이 나를 훈계하는 것은 당연해.'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해.'
이런 불합리한 것들(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맹목적인 반항을 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유 없이 소리치고 대들지 않습니다.
'저런 가난한 노동자가 되면 안된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
'고작 그런 이유로 넋두리를 늘어놓는 거야? 세상에 너보다 불행한 사람 많아!'
그렇다고 이런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 입 다물고 스스로 구속시키라는 소리도 아닙니다.
괜히 사람들이 스스로 구속시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문제의 중심엔 언제나 돈이 존재합니다.
돈이란 무엇입니까? 욕심입니다.
욕심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우리는 그 근원적인 문제를 바로 옆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닐까 합니다.
돈을 어떻게 소비하고 저축하고 벌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만,
그 돈이 인간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가르치면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교육이란 없습니다.
가치관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하여 과연 우리가 동의했는지 다시 한 번 물어보십시오.
언제나 어린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심리는
이러한 것들에 스스로를 구속시켜,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리광을 피우고, 철없이 뛰어놀기도 하며, 대들고 반항하는 그런 시절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회에 구속시킬 수밖에 없는 거대한 책임의 늪에서
이미 엎질러진, 돌이켜진 삶을 되돌릴 수는 없지 않냐는 물음에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싸워 이기는 것만이 세상에 전부입니다.
경쟁사회에서 이겨 올라가는 것 뿐입니다.
짖밟히면서 시기와 질투를 배우고,
짖밟으면서 성취감과 승리감을 배웁니다.
무리에서 벗어난 짐승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가락이나 빨면서
모두가 하는 '일반적인 것'에 대하여 욕심을 거둬버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머리를 깍고 산에 들어가 중이 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도대체 이런 생각의 꼬리를 무는 것에 대하여 왜 우리는 저평가를 하는 것입니까?
지극히 당연하다는 잣대로 왜 튀어나오는 생각을 죽여가고 있냔 말입니까?
신 앞에 평등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만인이 죽음 앞에서 평등할 터인데 우리는 왜 짖밟고 짖밟히는 것에 고심합니까?
우리가 금전거래를 하는 것처럼 '약속'을 하고 지불하고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일방적인 요구에 스스로를 끼워맞출 뿐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떻게' 벗어날지 찾아보는 것뿐입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대드는 것은
주체의식과 선택에 대하여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현대인들의 절망스러운 모습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빠져버려 모두 거둬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 봐야 마땅할 것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잣대에 우리는 그 권리를 스스로 찾아헤매고 있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보장할 수 없는 불완전한 틀 속에서
자유를 찾아 헤매는 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이맘 즈음에서 너무나도 많이 온 탓에 익숙해진 것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속을 여행하는 기분은 참으로 묘할 것입니다.
샤워장이 있고, 식사를 할 가게가 있는 그런 곳으로 가기를 원할 뿐이죠.
하지만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당신은 지금껏 해왔던 선택에 대하여
그것이 온전한 스스로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인지에 대한 의심 말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을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누구가, 무엇이 될 것입니까?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의식선상에서 익숙해진 것에 대한 믿음의 틀을 깨드리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대한 믿음의 탑을 부슬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의 승자는 아닙니다.
카뮈는 말했습니다.
"패배감을 뒤집어 쓰더라도 나는 마지막까지 웃겠다."
누구나 거짓된 승자가 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먼저 패배자임을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구속하게 만든 사회를 원망하고,
다시 조용히 사회로 돌아가 안락을 바라는 자를 동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그에게 훈수를 두지 마십시오.
과연 당신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것에서 벗어나십시오.
합리적인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만 존재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