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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07: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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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분열하는 세포처럼
인간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늘 사투를 벌일 수 있을까?
삶이란 선택이고, 결국 무언가를 믿어야만 한다.
그것이 신이던, 즐거움이던, 무엇이던 간에 믿지 않는 사람은 살 수 없다.
우주는 계속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남들처럼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겠지.
도대체 누가 그런 규칙을 정했을까?
도덕과 윤리는 누가 만들었고, 이성이란 정말로 옳은가?
우주는 계속 되어야만 한다는 불편한 진리에
언제나 패배감에 휩싸인 우리들 개개인의 선택을 나는 존중한다.
끝까지 싸워보거나, 지금 순간을 즐기거나,
패배감을 지우지 못해 삶을 끝내거나,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왜?라는 질문을 포기하자 삶은 아주 심플해졌다.
어떻게?라고 묻자 목적이 생겼고,
무엇을 할지 척하면 척, 눈치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으며,
그 순간은 바로 지금이며 다시는 오지 못할, 지나치면 잃어버릴 시간이고,
무조건 나는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만으로도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무슨 존재였는가? 악랄하고 더러운 등골 빼먹는 사기꾼인가,
짓궂고 얄밉지만 의리있고 남들을 위하는 마음씨 고운 이웃집 오빠였던가?
사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정해진 선택지를 따르는 것밖에 없다.
하다 못해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러도, 그 메뉴들 사이에서 골라야만 한다.
가장 불합리한 것은 원하지도 않는 세계에 들어섰고, 내가 그것에 맞춰가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원했는가?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약속이란 그 이름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
필요악은 침묵하면서 필요선에는 손가락질하는 아이러니.
악당이 남긴 저주에 시대의 영웅이 죽던 날,
우리는 그를 기리며 그의 행적을 추모할 것이다.
아무도 그가 이미 사라진 악당에게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다시 나타나길 바라거나, 자신들이 일어나거나, 어쩌면 악에 휩싸이거나.
아무도 원하지 않던 세상에서 그것이 당연하다는 이유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우리는 반성하지 않는다.
언제나 당연한 것은 반박할 가치가 못된다.
1+1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것들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얄밉기 그지없다.
자신이 믿는 그것마저도 사실은 편견이었음을 우리는 모른다.
"어차피 죽을 인생, 지금 죽지 그러냐?"
푸념하는 인간에게 비아냥으로 일침을 놓았던 말을 보았다.
우문현답이라고,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네가 떠나라는 거다.
이미 태어난 이상, 죽어야 하는 진리에서 거부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고,
우주가 100% 온전한 진리를 알고 있을까? 겨우 반쪽자리인데.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믿음에 따라 다를 뿐인데,
다수가 옳은게 정의라고 하던데, 정말 그런지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며,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못한다.
100% 내 의지도 없고, 그렇다고 100% 강요도 아니다.
언제나 50%인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를 100%를 향해 나 자신을 희생한다.
삶을 일찍이 끝내는 선택도, 끝까지 삶과 싸워 나가는 것도, 결국 나를 그것에 끼워맞추는 선택일 뿐.
우주는 계속 돼야만 한다.
모두가 말하는 당연한 '그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성악설, 성선설부터 뭐 백지론까지 그런 걸 다 떠나서,
100% 순전히 내 의지가 이 세계에서 표출되었던 적이 있는가?
이미 다른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생이라는 탑이, 내가 부수어버린다고 하여서
순전히 내가 쌓은 탑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이미 만들어진 것을 바탕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서 결국엔 그 탑도 참이 될 수 없다.
이런 모순적인 구조를 놓고 사람들은 말한다.
"일단 뭣도 모르겠고 어렵고 복잡하니까 다 잊고 즐기자."
즐기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자존감'이 낮다니 뭐라니 이상한 말들을 써가며 시덥잖은 위로를 한다.
"제가 정말로 자존감이 낮은데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내가 정말로 힘들었을 적에 자기계발서를 읽고 느낀 점은 하나다.
이 책에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라고 요구하는 걸까?
봉사활동도 하고, 책도 읽고,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보고,
내가 그 의지를 갖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렇게 해야만 변할 수 있다고 말하니까.
카르페 디엠? 즐기는 것도 좋다.
고뇌하는 인간, 영화 버드맨의 하이라이트 씬에서의 대사 "bye bye and fuck you." 처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다 좋다. 모두가 좋은데, 결국엔 나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렇게 쾌락에 찌들어 사는 인간들은 머저리들이야."
혹은 "어렵게 생각하고 어려운 말 써가면서 지껄이며 텃세부리는 인간들이 제일 꼴사나워."
요구할 권리? 그 전에 나는 100% 완벽을 원한다.
언제나 흰 종이에 적어도 내 눈에는 완벽하게 색칠되어야만 했고,
계산에 있어서 반드시 n/총량으로 나누어서 정확히 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사실 종이에 색칠한 건 100% 그 색깔이 아니며,
그 색깔은 순수한 개념을 가졌지만, 결국엔 모순된 이름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내 의지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 이 세상에 나를 끼워맞추는 나는 말이다.
하나는 남들처럼 기계같이 사는 사회에 타협하고 순응하는 '성실한 근로자'이며,
하나는 밑바닥에서 시궁창에서 기어다니며 쾌락만 추구하는 '중독자'이며,
하나는 세상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사색을 즐기는 '고독한 모험가'이다.
나를 세상에 끼워맞춘 이상, 나는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없다.
한 번 갇힌 감옥에서 100% 헤어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을 조금 내밀고, 팔을 뻗거나 얼굴을 부대끼는 정도야 가능할지는 몰라도....
이런 불완전하고 모순인 세상에서 순수한 장미처럼 피어오르는 이 희망이라는 것에 대하여,
우주가 계속 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계절이 존재하듯, 감정이 요동치듯, 낮과 밤이 바뀌는 것처럼,
우주는 계속될 수 없지만, 세상은 우주가 지속되기 위하여 사회를, 개개인을 채찍질한다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인류애? 공동체의식? 그딴 것 다 집어치우고 개인주의? 이기주의? 그딴 것도 다 집어치우고,
이런 삶에 대하여 결국엔 '자유의지' 마저도 거짓이었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제한된 생산량이 어떻게 더 큰 것을 능가할 수 있겠는가?
고작 작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이 자유의지는 이 세상에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희망이요,
가장 순수하고 고결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져가는 나무로다.
"병신아, 살아서 뭐할래?"
말하기 전에,
"병신아, 죽어서 뭐할래?"
라고도 말하지 말고,
"병신아, 살아도 죽어도 너는 병신이야."
라고 말해주길.
하지만 적어도 표현되어야만 한다면,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이 좋다는
어이없을 정도로 무서운 희망의 불씨가 오늘도 타오르기 시작한다.
"너는 아니?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 네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러니까 대답해줘.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반드시 거짓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