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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4 01: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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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1월 27일 영조는 광통교로 나가 백성들에게 청계천 준설 공사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나는 민력(民力)을 거듭 지치게 할까 걱정했다. 그런데 이제 보건대, 막혀 있는 것이 이와 같고 또 성을 지키려면 시내를 파내는 것이 더더욱 급선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성들이 대답하기를 "신 등이 어렸을 적에는 기마(騎馬)가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와 모래가 서로 맞닿게 되었습니다. 전에 일꾼을 동원해 깨끗이 파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또 이렇게 막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조는 대역사를 추진하기 전에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들었고, 그 사업의 명분과 정당성을 얻었다.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물은 뒤 준설 공사는 춘궁기에 하도록 지시한다. 춘궁기엔 백성이 식량이 모자라 고통 받을 시기라 노역 일당으로 받은 돈으로 그들을 구휼하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청계천의 범람 문제는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발생하기에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춘궁기에 공사를 하도록 지시를 한 것이다. 공사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왔을 때 영조는 명정전 월대에 나가 보았다. 그때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갔는데, 평시서(平市署) 제조(提調) 홍봉한(洪鳳漢)이 시민(市民)을 인솔하여 들어오자, 하교하여 위로하고 유시(諭示)하였으니, 대개 내를 파는데 자원하여 성책(成冊)된 자가 무려 1만여 인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준설 공사는 영조 36년(1760) 2월에 시작해 4월에 끝났다. 이 공사에는 수많은 백성이 동원되었고, 경비 역시 현재 가치로 환산해 약 8억 원 이상이 들어갔다. 영조는 백성들이 공사로 인해 고통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고 하여 그들에게 노임을 지급하고 공사를 재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한 준설 공사 이후 그 효과를 지속하고 오물이나 모래가 쌓여 수로가 막히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준천사(濬川司)라는 상설기관을 설치했다. 해마다 준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는데, 가능하면 춘궁기 백성을 먹거리가 없어 고달픈 시기에 실시하도록 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8345&CMPT_CD=P0001
영조의 이런뜻도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