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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9 10: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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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지금까지 접해본 것이라고는 도서관에 있던 수많은 책과 종이 펜 따위의
것들 뿐이였다. 연설가이자 역사가로 진로를 정한 이상은 그렇게 살아왔다. 어렸을 때는
글쎄, 뭇 아이들처럼 재미로 빵을 훔치거나 다른 집 문을 두드리고 다니는 놀이를 했던
것은 기억나는데 술이나 담배를 접해 본 적은 없기에 주점거리의 험상궃은 상인들과
노동자들이 너무 무서웠다.
- 북서쪽 주점거리 끝 200미터 지점 흑마술 상점가, 오른쪽 기둥건물 4층
그는 몇 번이나 쪽지를 폈다 접었다 하며 일부러 그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주점거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잘못 눈이 마주친 노동자에게 비웃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눈을 마주쳐서 비웃음 당한게 아니라 그가 입고 있는
옷들 때문이였다.
수도 칼튼 1대학에서만 입을 수 있는 회색 로브와 황갈색 목도리, 금으로 된 학교뱃지는
누가봐도 공부는 깨나 할 지언정 이런데 올만한 모습은 아님이 분명했으니까.
"어머, 대학생오빠? 여긴 무슨 일이에요?"
"네?! 예?! 누구세요?!"
마틴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번 더 놀랐다.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가 가슴이 깊게 파인 야한 옷을 입고 생글생글 웃고있었다. 그 모습에 마틴은
시선을 황급히 돌리며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습니다! 오늘은 더우니 내일은 비가 올 것 같네요! 하! 핫! 하!"
"대학생? 칼튼 1대학? 어머. 오빠 공부 잘하는구나? 우리집에 와서 술 한잔 안할래요? 내가 따라줄게?"
"아닙니다! 술을 마시면 뇌세포가 파괴되어 학업에 지장이 있게 됩니다! 저는 알콜분해요소도 적어
빨리 취하... 아니, 그게 아니고요!"
여자는 미묘한 표정으로 마틴에게 천천히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흐응. 그렇구나. 빨리 취한다고요? 그럼 어때요? 빨리 취한다음에 내가 다른 즐거움을 줄 수도 있는데?"
그리고는 한껏 굳어있는 마틴에게 슬쩍 자신의 허벅지를 보여주었다.
"끄악! 아닙니다! 저는 아직 연애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까지 과제를 내야 합니다!"
마틴은 고개를 숙여 황급히 인사한 뒤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가
피식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고는 팔짱을 꼈다.
"흥. 저런놈이니까 책이랑 살지."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여자는 마틴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는 듯 웃었다.
조금 이상한 여자와 엮이긴 했지만 마틴은 무사히 쪽지에 적힌 주소의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둑조합. 제국은 좀도둑이나 강도, 산적무리와 같은 자들을 잡아들여 회유와 협박 등을 통해 도둑길드를
창설하도록 했다. 그래서 제국이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음습한 임무를 이들에게 맡겼다. 예를들어 적국이나
외교국의 사신 암살이나 외교문서 강탈 같은 일. 첩보부가 행동할 수 있는 행동반경은 제한이 있었지만
도둑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말하자면 공무원 같은 존재였다. 이들은 제국의 음습한 임무를 해 주는 대신
자치권을 보장받아 어느정도의 행동보장을 받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마틴은 지금 그 도둑소굴에 발을 들이는 셈이였다.
- 끼이...
"...실례합니다...?"
의외로 문이 쉽게 열리자 마틴은 당황했다. 도둑길드라서, 책에서 본 것처럼 문을 열려면 스핑크스가 나와
세가지 질문을 하던가 뭐 그런것들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보통의 문이였기 때문이다. 문 안쪽은 습한 곰팡이 냄새와
조금씩 들어오는 햇볕에 먼지같은 것 그런 것들이 보였다.
"4층이라고?"
그는 의외로 높은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한 층 한층 걸어 올라갈때마다 흥겨운 바이올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 했다.
- 넌 여기 왜 왔냐!
"히익!"
4층 계단 안쪽 문 입구에 가까워지자 누군가 외쳤다. 마틴은 화들짝 놀랐다.
- 히익이 이유냐?! 넌 누구냐! 왜 왔냐!
"아... 안녕하세요! 제라드 마틴입니다! 칼튼 1대학 소재 역사연구학과 4학년입니다! 로터스 브라이튼 교수님의 소개로 왔습니다!"
- 로터스 브라이튼?! 하! 들어오지마! 대학생이 여길 왜 와?! 우리 얼굴 보면 넌 오늘밤에 죽는다! 내려가!"
문 안쪽의 목소리가 엄포를 놓자 마틴은 겁내며 뒤돌아섰다.
"실... 실례했습니다! 얼굴 안봤으니 안죽이는거죠?!"
그렇게 말하며 줄행랑을 치려던 마틴은 멈칫 하더니 다시 뒤를 돌아 문 앞으로 가서 조용히 귀를 댔다.
- 아직 안갔냐?!
눈을 질끈, 그러다 다시 뜬 마틴이 용기를 내어 외쳤다.
"하지만 로터스 교수님께서 당신이 날 도와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 내가?! 널 왜?!
잠시 말이 없던 마틴이 말을 이었다.
"프란체 공화국으로 가는 배를 당신이 빌려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 뭐?!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젠장! 로터스 오라고 그래!
입술을 질끈, 마틴이 더 커진 목소리로 외쳤다.
"교수님은 어제 저녁 돌아가셨습니다!"
-...뭐?
"세번째 신의 자식을 각성시킬 열쇠가 교수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신과 두 번째 신이 제국군을 앞세워
가이아 행성을 완전히 집어삼킬 겁니다! 프란체 공화국으로 망명한 세번째 신의 자식을 찾아야 합니다. 문좀
열어주십쇼. 교수님은 첫 번째 신이 보낸 사자에게 살해를... 저는... 경찰에게 쫓기고... 있..."
마침내 마틴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국의 표적이 된 것 보다도 교수의 죽음이 더 슬펐기 때문이다.
- ...들어와. 얼굴은 보이겠지만 죽이진 않을테니.
오랜 침묵 끝에 문 너머의 목소리로부터 허락을 받아냈다. 마틴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며 문을 열었다.
"젠장. 이딴식의 푸념은 싫은데 말이야. 야! 바이올린 그만 연주해!"
마틴은 힘이 쭉 빠졌다. 걸걸한 목소리의 정체는 모아종족이였다. 아무리 커 봐야 인간남자의 무릎정도까지밖에 안되고,
동글동글한 솜뭉치에 가느다란 팔다리만 달려있는데 까만 눈 두개만 보이는 종족이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것도
세 마리의 모아였다. 하나는 현을 잡고 하나는 활을 잡고 하나는 바이올린을 힘겹게 들고 있었다.
가늘고 까만 팔 다리를 허리(혹은 옆 가슴)에 올린 모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난 귀엽지! 하지만 식칼을 들면 무서워지니 조심해라! 왜! 내가 귀여운건 나도 알아! 그래서 어쩌라고!"
"아뇨. 예... 그렇군요. 교수님이 말씀하셨어요! 귀엽게 생겨가지고 쌍욕을 입에 달고사는 친구가 있다더니 당신이군요?!"
"기어오르지마라! 일이야기를 해보자! 그리고... 로터스 이야기도..."
모아는 책상위에 턱 하고 앉았다. 어느새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모아 세 마리가 의자 하나를 힘겹게 들고 와 마틴의 뒤에 놔 두었다.
까만 콩같은 눈이 마틴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